[인사이드피치] 김병현을 놔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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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월드시리즈 우승의 영예를 안고 고국에 돌아온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뜻하지 않은 기행(奇行)에 무척 놀랐다.그 속사정을 알고 싶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환하게 웃으며 축하인사를 받고 주위와 악수를 나누는 등 자랑스러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카메라만 보면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심지어 언론의 취재를 피해 줄행랑쳤다.

딱 한번 단 둘이 만났다. 잠깐 동안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런 행동에 대해 "그냥 부담스럽다"는 말만 했다. 그는 달라진 게 없었다.

원래 그랬고 갑자기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싫은 것뿐이라고 했다. 남보다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남들 앞에 나서기 싫고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고 싶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서울에서 그를 자주 만났던 박찬호(28)는 김병현이 사람들을 기피하는 이유를 "잊고 싶은 기억을 자꾸 들춰내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병현이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아픈 기억이 있다. 워낙 큰 일이었다.

내년에 다시 당당하게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지나간 그 아픈 기억을 잊어야 한다. 마운드에 올랐을 때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 움츠러들어 볼을 던질 수 없다. 스스로도 그날의 기억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든 병현이를 만나면 그날의 그 홈런을 꺼내 얘기한다. 병현이로서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아버지 김연수씨도 말했다. "(광주)집에 온 병현이는 조금 피곤해 보였을 뿐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집에 있는 동안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자고 먹기만 했다. 집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아주 적었다. 그런데 먹고 자기만 하면서 너무 행복해 보였다."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김병현은 처음과는 조금 달라졌다. 시상식에도 참석하고 인터뷰도 했다.

한 시상식에서 예상대로 "그때 홈런 맞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 맞았구나…라는 생각뿐이었다"고 대답했다. 너무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틀에 매인 생활을 불편해 했다. 몇시에 어디로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는 얽매임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결국 그는 백악관 방문을 위해 출국하면서 모두를 따돌렸다. 주위에도 알리지 않았고 언론의 카메라도 피했다.

미국 LA에 머물고 있는 김병현은 16일 박찬호를 만났다. 그는 오는 20일께 귀국을 고려하고 있지만 다시 자신에게 쏟아질 관심을 두려워하고 있다.

방송 스케줄은 잡지 않았고 팬들과 만나는 사인회만 두번 예정돼 있다. 그는 "이번엔 조용히 들어갔다 조용히 운동만 하고 조용히 나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겨울은 그를 아픈 기억의 주변에서 떠돌게 하는 '시련의 계절'이 아니라 내년 봄 따뜻한 햇살과 함께 꿋꿋하게 마운드에 오를 수 있는 '희망의 계절'이 돼야 한다. 그가 먼저 웃으며 홈런 얘기를 꺼낼 때까지 그의 아픈 기억을 들추지 말자.그는 이제 스물두살이다.

이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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