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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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1. 검사의 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것은 1962년 2월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61년 12월 성균관대에서 시험을 치른 뒤 마산 집에 내려가 있었다. 2월 어느 날 서울에서 생활하시던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몇 백m 떨어진 아는 사람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합격사실을 알려 주셨다.

당시 우리 집에 전화가 없어 아버지께서 그 집으로 연락을 하신 것이었다. 전화를 설치한 집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고 회사나 사무실 같은 데나 전화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한전의 방계회사인 '한공'에 근무하느라 서울에서 객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날은 눈이 드문 마산에도 따뜻한 햇볕 사이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중에 "그 날 서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고 중앙청 정문 옆 담장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려고 광화문에서 중앙청을 향해 걸어가는데 몇 백 m 앞에서도 네 이름이 보였다"고 회상하셨다.

당시 합격자가 50명인데다 합격자 명단을 붓글씨로 크게 써 방(榜)을 붙였기 때문에 어지간히 먼 거리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아들의 합격 여부를 확인하려는 아버지의 집중력이 순간적으로 천리안 같은 시력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시절 '마부'라는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었다. 어렵게 살던 마부가 아들이 고등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그 영화에서도 합격자 명단이 게시된 장소는 중앙청의 바로 그 자리였다. 아버지는 나의 합격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그날 눈 내리는 광화문 거리를 오가는 달구지들과 당신의 심경이 '마부' 영화와 어쩌면 그리도 같은 상황이었던지, 함박눈을 맞으며 광화문 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걸어 왔다고 하였다.

박정희(朴正熙)장군의 군사정권 시절이던 62년에는 내각사무처가 고등고시를 주관했다. 지금의 행정자치부나 그 전의 총무처와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군사정권은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법관양성 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에는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사법관 시보(試補)제도가 있어서 법원과 검찰에서 일정기간 수습을 받고 판사나 검사가 됐다.

그런데 서울대에 세워진 사법대학원에서 2년간 공부를 하고 그 과정을 수료해야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거나 변호사로 활동할 자격을 주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나는 내심 이렇게 제도가 바뀐 것을 반겼다. 지방에서만 공부를 한 나로서는 서울대 대학원에 가서 훌륭한 스승들의 강의를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번거롭게만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부산대 법대 3년을 마친 상태라 사법대학원에 입학을 할 수 있는지, 입학을 하면 대학 학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가 걱정됐다.

나는 부산대 문홍주(文鴻柱)총장과 법대 학장 그리고 교수들을 차례로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했다. 교수님들은 학부 졸업과 사법대학원 입학과는 관계가 없다면서 아무 걱정 말고 서울로 가라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4학년 학점은 그때그때 내려와서 시험을 치든지 레포트를 제출해 학점을 이수하고 당시 국가에서 시행 중이던 학사시험에 통과하면 된다며 격려해 준 교수님도 있었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더구나 남이 모르는 가운데 그 희열을 만끽한다는 것은 어디에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나는 친구들도 모르게 고등고시에 응시했다. 왜냐 하면 그야말로 시험 삼아 치른 것이고 합격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울방학 때 시험을 치르고 온 탓에 마산~부산간 통학열차에서 만나는 친구들도 내가 고등고시에 응시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내가 합격을 하고 난 다음 맞이한 개강 날 학교에 가기 위해 구마산역에서 새벽기차에 올랐다.

새벽기차를 타는 아들을 위해 4시에 일어나 콩나물국을 마련해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캄캄한 세숫대야가 나도 모르게 흘린 코피로 가득 찼던 일들이 벌써 먼 옛일같이 아련해지는 것 같았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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