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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97) 다가오는 중공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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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그들에게는 운동전(運動戰)이라는 개념이 있다. 일본군을 비롯해 장제스(蔣介石) 군대와 내전을 벌이면서 닦은 전법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로 구사했던 이 전법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소한의 타격으로 상대의 막대한 피해를 이끌어낸다는 개념이다.

중공군은 치밀한 사전 정찰로 상대의 약점을 알아낸 뒤 병력을 그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전법에 능했다. 기습과 매복 등 변칙에 강해 국군과 연합군은 애를 먹어야 했다. 강원도 횡성에서 중공군 나팔수가 신호를 울리는 가운데 병사들이 공격에 나서고 있다.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전선 정면보다는 측면을 선호했고, 한군데를 집중적으로 타격하면서 구멍을 뚫은 뒤 그곳으로 몰려 들어가 상대의 전선을 여러 방면에서 공격한다는 식의 구상이다. 굳이 말하자면 기습(奇襲)과 돌파(突破)에 이은 우회와 포위가 전법의 요체다.

그들은 한반도 중부에 동서로 형성된 전선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서부 전선에 몰려 있는 미군과 연합군은 상대하기 버거웠다. 그에 비해 동부전선은 공략하기에 다소 편했다.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이뤄졌지만 동부전선을 지키고 있는 국군은 일단 화력에서 미군이나 연합군보다 상당히 떨어졌다. 게다가 국군은 예비병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일단 전선 정면이 뚫리면 그를 받쳐줄 후방의 부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중공군은 그 점을 간파한 것 같았다.

그들이 움직였다. 나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취약한 동부전선을 중공군이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가 펴낸 전사를 보면 1951년 5월 3일에서 7일까지 강원도 화천 지역의 야간 차량 통행량이 960대로 늘었고, 8일에는 춘천~화천을 잇는 지역에 다수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중공군은 강원도 양구 지역에도 출현했고, 소양강에 다리를 놓는 모습도 목격됐다. 5월 13일이 되면서 미 8군은 중공군의 주력이 동부전선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인제와 홍천·평창군 일원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중공군이 공격을 해올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끄는 1군단은 당시 38선 이북에 있는 유일한 아군이었다. 전선 최북단에서 설악산을 무대로 고지를 뺏고 뺏기는 고통스러운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설악동 입구 평지가 적과 쟁탈전을 벌이는 지점이었다. 험준한 설악산의 지세 때문에 부대 사이의 통신이 두절되는 경우도 잦았다.

최덕신(1914~89), 86년 북한 망명.

당시 우리 1군단에는 수도사단과 11사단이 있었다. 설악산 지역에서 작전을 벌이는 11사단 예하의 1개 연대가 통신이 두절됐다는 소식을 듣고 사단 사령부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사단장은 최덕신 준장이었다. 그는 국군 지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미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그래서 늘 미 군사교본을 탐독했다. 내가 그를 찾아 사단 사령부에 들렀을 때도 그는 교본을 보고 있었다.

내가 통신 두절 상황을 묻자 “나도 걱정하고 있다”는 말만 했다. 나는 “책도 중요하지만 연락 장교를 보내서라도 연락을 유지하도록 하라. 미군 교본에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핀잔을 줬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는 5·16 직후 외무장관에 올랐으나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가 나빠져 미국으로 건너간 뒤 종국에는 북에 망명했다. 북한에서 천도교 최고위 지도자 자리에도 올랐다. 어쨌든 그때 그 전장에서의 최 장군은 뭔가 힘이 빠져 있는 듯해 보였다.

공부는 늘 필요하지만, 책상에 파묻히면 곤란하다. 당시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적군의 동향이 전해지던 긴박한 때였다. 더구나 변칙(變則)에 능해 늘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인상을 주는 중공군이 동부전선으로 몰려오고 있던 시점이었다. 교본에 나와 있는 원칙적인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전선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대응하려면 그때는 늘 움직이면서 현장을 살피는 게 중요했다. 미군이 드디어 서두르기 시작했지만, 서부의 주력을 동부로 옮길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중공군 5단계 2차 공세의 조짐이 밀려오면서 위기감이 팽배했다. 중공군은 허점을 잘 노린다. 그 허점은 사단과 사단이 옆으로 붙어 있는 경계선인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이 될 것이다. 사단이 아니라면 군단과 군단이 붙어 있는 경계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일까. 어디로 중공군은 강원도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어 공격을 펼쳐 올 것인가. 차분하면서도 면밀한 대비가 필요한 때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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