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해지기 전의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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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왜 그런지/가로등 불빛이/따스해 보인다.//잎 떨어진 나무에 바람이 찬데,//지나온 험난한 길과/골짜기의 시냇물이/요지경처럼 얼비친다. //꽃 한 송이 만나고 싶다!"<'유역(流域)에서'전문>

민영(閔暎.67)시인이 새로 펴낸 시집 『해지기 전의 사랑』에는 떠나는 것들의 아픈 서정과 올곧은 마감의 의지가 함께 가고 있다.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40여년의 시와 삶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어느덧 망칠십(望七十)의 고개 앞에 다다랐다. 내 시의 길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득한 느낌이 든다"는 민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향토적.인간적 서정과 혹독한 현대사를 살아낸 자의 따스한 세상의 꽃 한 송이 피우고 싶은 의지가 더욱 비장하게 다가온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 할 기쁨조차/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무덤으로 실려갔을 때도 나는/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서커스의 소녀가 어느 한 순간/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되어 날아가며/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시 '묘비명'일부다. 부잣집에서 돈을 훔쳐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던 남민전사건의 전사(戰士)시인 김남주를 기리는 추모시도 쓰고 젊은 시인들과 투쟁의 거리에도 나섰던 민씨는 앞장 서 죽지 못하고 "요행히도 늙은 표범처럼 살아 남았다"고 자탄한다.

그러나 민씨의 '묘비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하는" 떠남의 미학으로 지금 우리 현실에 경계심을 일깨운다. 구차한 미련이나 보상을 바라며 대롱대롱 메달려 추하게 살지 말고 한 순간에 깨끗이 사라져가는 지조의 미학을 떠남.죽음의 미학에 덧씌워 보여주고 있다.

"고려 때 이자현은/명문 세가의 자식이었다. //도깨비감투 벗어던지고/산으로 들어갔다. //왕이 불러도 나오지 않았고/청평호 맑은 물 속에 뼈를 묻었다. //야 이 넋빠진 자식들아!/정치가 망치된 지 이미 오래다. //그 뼛가루 아직도/사금(砂金)처럼 흩어져서 반짝이느냐□"('청평호'에서 전문)

옛날 이야기를 빌려 작금의 사회를 후련하게 꾸짖고 있다. 냉이꽃 같은 작고 이쁘고 순수한 서정을 깊이 품고 있으면서도 '떠남의 미학'인 이 시집에서 조차 의지적 정서를 멈출 수 없게 하는 우리 현실이 아프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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