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벤처다] 中. 벤처 생태계 복원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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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전자상거래 업체인 옥션의 현재 시가총액은 1조6000억원이다. 또 올 들어 지난달 21일까지의 거래액이 1조원을 넘어섰다. 서울 명동의 롯데백화점 매출에 버금간다. 설립 6년 만에 국내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가 된 것이다.

옥션의 성장사를 보면 벤처 생태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생산자(옥션).소비자(벤처캐피털).분해자(코스닥 시장.e베이) 등 세 구성원이 옥션의 성장단계마다 제 역할을 했다. 옥션의 창업자는 더 이상 회사를 키우는 데 한계를 느끼자 지분과 경영권을 벤처캐피털인 KTB네트워크에 넘겼다. KTB는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전문가를 경영진에 투입해 수익모델을 짜냈다. 이후 옥션은 코스닥에 입성한 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e베이의 계열로 편입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한섭 KTB네트워크 대표는 "옥션은 경영 고비 때마다 최적의 조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런 벤처 생태계는 잘 작동하고 있는가.

?개점휴업 중인 벤처캐피털=A창업투자회사의 B사장은 꿔준 돈을 받는 일로 일과를 시작한다. 여력이 좀 있다는 C창투사는 부동산 담보가 없으면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 리스크가 커지자 벤처캐피털이 본연의 업무를 접고 담보를 잡아 돈을 꿔주는 일에 골몰하게 됐다. 이 회사 관계자는 "창투업이 대부업과 다를 게 없다"고 토로했다. 내년에도 벤처자금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 벤처펀드 만기자금이 올해보다 3.5배가량 많은 1조2000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디지털TV 소프트웨어 회사인 알티캐스트의 지승림 사장은 "논에 물 주듯 골고루 나눠주려다 보면 정책자금만 쳐다보는 벤처가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벤처 지원 형태는 우리와 다르다.

칭화(淸華)대 과기원의 원궈창(溫國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정부는 벤처가 유치한 자금의 30%를 지원한다"면서 "투자한 업체가 수익을 내면 정부 몫의 수익금 전액을 그 회사에 투자한 일반인에게 나눠줘 벤처 투자를 장려한다"고 말했다.

◆ 기술시장 물꼬 터줘야=미 실리콘밸리의 세계 최대 인터넷 장비 업체인 시스코는 핵심기술만 움켜쥐고 있다. 나머지 기술은 2000년 이후 인수한 39개의 벤처기업에 맡긴다. 다양한 제품을 발빠르게 내놓는 비결이다. 우리 사정은 어떤가. 한국기술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술매매 실적은 140억원에 불과하다. 벤처와 대기업이 상생하는 토양이 마련돼 있지 않다. 한 벤처기업인은 "어렵사리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이 헐값에 사들이려 한다"고 말했다. 인수합병(M&A)을 어렵게 하는 제도적 장벽도 문제다. 전하진 본웨이브 대표는 "'다산다사(多産多死)'로 표현되는 벤처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선 기술매매와 관련한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원도 원주의 의료기기 산업단지는 산학연(産學硏) 혁신 클러스터의 한 모델로 여겨지고 있다.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중심이 돼 자생적으로 형성된 이 벤처단지는 출범 6년 만에 10만평 대지에 66개 벤처기업을 유치했다. 올 수출 예상액은 3000만달러다. 그러나 이 단지의 산파역인 윤형로 연세대 교수는 "벤처가 날개를 펴려면 전문경영인과 벤처캐피털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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