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치 브로커들의 천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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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진승현 게이트'의 내막이 벗겨지면서 권력 주변에 기생하는 정치 브로커들의 추한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과거 민주화 투쟁 시절에 밑바닥에서 고단한 야당 생활을 하다 정권이 출범한 뒤 권력 브로커나 기업 로비스트로 변신한 부류들의 비뚤어진 모습들이다.

이른바 '여의도 특무상사'로 불린다는 당료 출신 중 일부가 벌인 탈선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신광옥 법무부 차관과 陳씨의 1억원 수수 의혹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의심받는 고참 민주당원 최택곤씨도 그런 부류의 인물로 꼽힌다.

금융감독원의 조사를 무마해 주는 조건으로 기업체에서 2억5천만원을 받아 구속된 아태평화재단 후원회 사무처장 출신의 황용배 전 마사회 감사의 사례도 비슷한 사정을 담고 있다. DJ 정권의 변두리 조직 부패가 여기에 이르렀나 하는 개탄을 자아내게 한다.

무엇보다 현 정권 내부에 이런 부패의 독버섯이 자랄 수 있는 풍토가 있었다는 자체가 개탄스럽다. 만년 야당의 고참 당원 신세에서 벗어나 권력의 주변에 앉은 이들 중 일부가 브로커로 나선 배경은 권력 이동기의 특수한 상황 탓이다.

현 정권 들어 호남 출신 실세 인맥과 연줄을 맺으려 안간힘을 썼던 기업체 인사들은 '여의도 특무상사' 출신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고, 일부 고참 당료 출신은 스스로 이권을 찾거나, 돈과 권력을 연결해 주는 '중개상'으로 나섰을 것이다.

건전한 로비 문화와는 거리가 먼 정치 풍토에서 이런 식의 청탁 관계는 거액의 뇌물이 오가는 검은 거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부패는 DJ 정권의 허점 많은 권력 관리의 모습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권 출범 때 야당 시절의 무자격 당료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실수의 대가일 수도 있다.

당시 대다수 고참 당료들은 어려웠던 야당 시절을 내세워 공기업의 임원 자리를 요구했고 현 정권은 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옥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 온정(溫情)주의적 낙하산 인사가 지금까지 DJ 정권의 부담이 되고 있다.

崔씨 같은 민주당 비상근 부위원장이나 연청과 아태재단의 고문.자문위원 명함을 찍어 가지고 다니는 여권 주변 인사들이 수백명이나 된다는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다수가 선의의 동지일 수는 있다. 그러나 崔씨 같은 인물들의 기막힌 행각이나 아태재단 출신의 말썽은 권력 주변의 단속이 엄정하지 못한 탓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현 정권은 권력기관과 그 주변에 대해 대대적인 정비에 나서야 한다. 누가 호가호위(狐假虎威)를 하면서 이권을 찾아다녔는지, 누가 권력을 팔고 다녔는지를 추적해 정리해야 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6.15 남북 정상회담과 노벨 평화상 수상만으로는 부족하다. 金대통령은 깨끗한 정부의 부패 척결 의지를 새롭게 다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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