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프랑시스 퐁주 '물'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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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 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넙죽이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향상(向上)'의 반대.

-프랑시스 퐁주(1899~1988) '물'중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낳은 퐁주(Ponge)의 하이퍼리얼리즘. 사물이 거기 있고 그 사물을 보는 시선이 여기 있다. 사물과 시선 사이에는 결코 건너뛸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사물을 구원하고 인간을 구원한다. 감정이나 욕망이 제거된 최초의 순수한 세계가 복원되는 순간이다. 내리는 비를 보고 슬퍼할 것 없다. 물의 아집인 중력(重力), 수력발전소가 슬프던가□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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