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성조기에 경례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소연방이 힘겹게 명맥을 이어가던 1990년 알마아타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 문화장관을 방문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극장 소속 가무단을 한국에 초청하는 데 필요한 절차였다.

그때 그곳 동포 언론인 한사람이 충고를 했다. 문화장관을 만나거든 개구일성(開口一聲) 고려인 연예인들이 카자흐스탄 국민임을 강조하고 문화교류 차원에서 그들을 데려가고 싶다고 말하라고.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고위 관리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옛소련 동포 50만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사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은 경제사정이 그들을 앞선 나라들이 그들의 동족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당연히 민감하다. 그들의 경계의 대상에는 한국과 독일과 이스라엘이 포함된다. 이런 사정은 소연방이 15개 공화국으로 분리된 오늘도 변함이 없다.

***해외동포 정책에 촉각

동북 3성(省)에 2백만명 가까운 조선족이 사는 중국의 경우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특수사정 때문에 한국의 동포정책과 한국인 여행자들의 언행에 더욱 신경이 날카롭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에 대한 한국정부의 정책이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뿌리를 흔들 수도 있다고 경계하는 것이다.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아웅산에서 순직한 함병춘(咸秉春)박사는 이민사회의 문제에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70년대 초 미국주재 대사로 부임해 동포 유지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미국에 이민온 한국인들은 성조기에 경례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기회의 나라 미국에 하루 빨리 적응하라는 지극히 당연한 당부였다. 그때는 한국에서 개각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후보의 공천이 임박하면 전화통 앞을 떠나지 않는 동포가 많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동포사회는 발끈했다. 연일 귀하는 도대체 어느 나라 대사냐고 咸대사를 공격하는 성명이 나오고 동포신문들이 그를 공격했다.

해외동포 문제는 섬세한 유리공예품 같이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모국정부에 의한 해외동포의 지나친 우대는 이민간 나라를 자극하기 쉽다. 헌법재판소가 헌법과 맞지 않는다(憲法不合致)는 결정을 내린 재외동포법은 결과적으로 이민간 나라에 따라서 동포를 차별대우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주문대로 문제의 법을 고칠 경우 예상되는 중국과 옛소련 공화국들의 반발은 더 큰 문제다.

지금의 재외동포법은 해외동포들의 한국 출입국과 체류,취업과 부동산 취득, 금융기관 이용을 아주 후하게 규정하고 있다. 다만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을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해외로 나간 동포들에게 한정한 게 문제다. 엄혹한 일제(日帝)통치를 피해, 또는 넓은 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북간도와 연해주로 이민간 사람들의 후예들이 이런 혜택에서 제외된 것은 분명히 특정지역 동포에 대한 차별대우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2003년까지 재외동포법을 고쳐야 하는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중국과 옛소련 공화국에 사는 동포들에 대한 대우를 미국.호주.뉴질랜드 동포들에게 보장된 혜택의 수준으로 상향조정하면 재외동포들간의 불평등 문제는 해소된다. 그러나 중국과 옛소련 공화국들과 빚을 갈등으로 혜택을 받는 동포들보다 더 많은 동포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 코리안 현지화 목표 둬야

재외동포 정책은 기본적으로 코리안들이 선택한 "제2의 조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현지화하는 것을 장려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 역이민을 유혹하지 말아야 한다. 이민사회에 너도 나도 장관으로, 국회의원으로, 도지사로 '금의환향'하겠다는 헛바람이 불면 코리안의 해외정착은 어렵다.

미국의 코리안에서 연방 하원의원과 억만장자들이 나오고, 러시아 연방의회에 고려인들이 진출하고, 루드밀라 남 같은 정상급 성악가, 아나톨리 김 같은 큰 작가가 나온 것은 결코 한국의 동포정책에 힘 입어서가 아니다.

코리안은 어디에 가서 살아도 코리안이다. 재외동포법이 코리안들의 현지화에 걸림돌이 돼선 안된다. 중국쪽 백두산 천지에 올라 단군 할아버지한테 제사 지내고 태극기 들고 목청껏 애국가 부르는 빗나간 민족정신으로 재외동포법을 만들 수는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공감대만 담겨 있으면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