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한국 16강 한 풀어줄 파란 눈의 '지략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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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지난 9일 미국과의 평가전을 마친 뒤 한국 축구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무릎을 쳤다.

한국은 미드필더를 전진 배치, 미국팀을 압박했고 수비 라인도 다른 경기에 비해 5~10m 이상 올라가 허리를 받쳤다. 그러자 결코 만만찮을 것으로 생각했던 미국이 전반 내내 전혀 힘을 쓰지 못했고, 한국은 경기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한국의 '허리 강화 작전'은 다름 아닌 아프신 고트비(39.사진)의 조언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핌 베어백 코치 등은 이제 한국사람 이름처럼 친숙하지만 고트비는 비디오 분석관이라는 그의 직책만큼이나 생소하다.

이란계 미국인 고트비는 미국 U CLA 졸업 후 2년여 동안 여자축구팀 코치를 하다 전력분석가의 길로 접어들어 현재까지 10여년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아약스 등 명문클럽과 자메이카 대표팀 분석관 등으로 활동해왔다.

고트비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월, 2년 전부터 그를 알고 지내던 베어백 코치가 추천하면서였다.

이용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기술위원회의를 거쳐 고트비를 영입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만나 2002 월드컵 본선 때까지 계약했다. 그는 이후 홍콩 칼스버그컵과 두바이 4개국 축구대회, 컨페더레이션스컵 등 A매치 때마다 한국 대표팀에 상대팀 분석 자료를 제공했다.

조 추첨에서 미국이 한국이 속한 D조에 배정되면서 고트비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그가 1997년부터 98 프랑스 월드컵 때까지 미국팀의 기술분석관으로 일해왔다는 점 때문이다.

본선 조 추첨식이 끝난 뒤 대표팀은 미국과의 평가전에 대비,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고트비를 한국으로 불렀다.

고트비는 도착 즉시 미국 선수들의 월드컵 예선전 경기 모습과 전술상의 특징을 컴퓨터로 분석해 히딩크 감독에게 제시했다. 미국과 한국 선수들 개개인에 대한 상세분석 자료까지 첨부했다. 이를 토대로 히딩크 감독은 지난 5일 오전 미팅 때 선수들에게 미국 대비책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의 3-4-3 시스템에서 네 명의 미드필더를 수평으로 세웠으나 고트비의 조언에 따라 박지성과 김남일을 수직으로 배치했다.

미국팀은 미드필드에서 한번에 공격진으로 길게 이어주는 패스가 위력적이기 때문에 다이아몬드형이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그는 체력과 공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난 박지성이 다이아몬드 위쪽 꼭지점의 적임자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고트비의 미국 해법은 그대로 적중했다.

대표팀 선수들도 비디오 분석법 덕분에 전술 이해가 쉬워졌다고 말한다. 이을용(부천 SK)선수는 "미국전에서 맞섰던 코비 존스가 패싱 능력과 순간적 스피드가 뛰어나기 때문에 미리 동선을 읽고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대비책을 알고 경기에 임해 수비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고트비에 대한 대표팀 내외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한국 선수들이 단시간 내에 유럽이나 남미의 축구 강국을 돌파하는 길은 상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이를 토대로 짜임새 있는 전술을 구축하는 것 뿐이라는 공통된 생각에서다.

신문선 중앙일보 축구 해설위원은 "축구선수들은 90분간 비행기가 항로를 따라 날듯이 약속된 툴 속에서 움직인다"며 "현대축구에서 기술분석은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고트비는 "한국이 본선에서 싸우게될 포르투갈.폴란드.미국에 대한 집중 분석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를 선수들이 실전에 적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축구대표팀 '책사' 고트비의 혜안에 한국의 16강 진출을 거는 것이 지나친 기대일까.

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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