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신경림 '폐촌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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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떨어져 나간 대문짝

안마당에 복사꽃이 빨갛다.

가마솥이 그냥 걸려있다.

벌겋게 녹이 슬었다

잡초가 우거진 부엌바닥

아무렇게나 버려진 가계부엔

콩나물 값과 친정어미한테 쓰다 만

편지

빈집 서넛 더 더듬다가

폐광을 올라가는 길에서 한 늙은이 만나

동무들 소식 물으니

서울 내 사는 데서 멀지 않은

산동네 이름 두어 곳을 댄다.

- 신경림(1935~) '폐촌행'

나도 어느 날 그런 폐광촌에 가 보았다. 흐린 담벼락에는 금방 찍은 선거벽보가 고함치고 그 너머 인적 없는 처마 밑, 빈 라면 봉지에 흙을 담아 심어놓은 봉선화가 저녁 빛을 받아 상처처럼 빨갛게 독이 올랐고 악몽 같은 검은 먼지가 소리없이 쌓이고 있었다.

그곳에 지금은 카지노를 세워 성업 중이라지. 시인이 사는 데서 멀지 않은 '산동네'는 재개발돼 아파트가 들어섰으니 그 옛 '동무'는 또 어느 변두리로 흘러갔을까?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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