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용산기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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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한말 조선 정계를 떡 주무르듯 했던 청나라 공사 원세개(遠世凱)는 부임시 새파란 26세였다. 대단한 미남이었다던 이 애송이는 감국대신으로 통했다. 조선의 감독관이란 뜻이다.

속방(屬邦)의 국왕을 능가하는 위세는 차라리 횡포였다. 독대 중에 고종을 향해 주먹을 날릴 뻔했다는 말이 서울 외교가에 나돌던 판이었으니…. 러시아에 몰래 청했던 보호요청을 맹추궁할 때였다.

청일전쟁으로 내빼기까지 10년간 조선을 갖고 놀았던 건 원세개의 청나라였지만,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던 이 땅으로부터 실속있는 '한 건'을 건진 건 일본 쪽이었다. 임오군란(1882년) 마무리 과정에서 경비군대 주둔권을 따낸 것이다. 공사 보호 명목이었다.

이때 맺어진 제물포조약은 근대국가 조선이 외국군 주둔을 허용한 첫 기록이다. 해서 일본병력이 자리잡은 곳은 서대문과 명동1가 두 곳이었다.

이들이 용산으로 헤쳐모여 한 건 한일합방 전후. 지금의 남대문경찰서에서 이태원.남영동 일대에 병영시설을 착착 만든 뒤인 1908년 뻑적지근한 낙성식까지 가졌다. 당시 21개 사단을 보유했던 일본은 제19, 20사단을 상주시키며 조선군사령부라 불렀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론 서울 용산구 용산동이다. 해방 후 공교롭게도 미8군이 바통을 잇고 있지만, 이 용산기지 4만5천평에 미군용 1천66가구 아파트 건설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다. 기지 내 건물 신개축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양국간 협의대상이라는데, 이 뉴스를 보는 심회(心懷)는 간단치 않다.

우선 용산기지를 오산.평택 인근으로 옮기기로 한.미 양국이 합의한 게 10년 전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했더니만 1백억달러 이전비용에 밀려 흐지부지돼 오늘에 이른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한미연합사.유엔사.주한미군사령부가 집합한 이곳은 서울의 균형발전이란 차원에서라도 되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강남북을 잇는 요지 85만5천평이 수도의 허리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드컵을 치르는 국제도시 이미지에도 영 말씀이 아니다.

전국에 7천5백만평이라는 미군의 기지.훈련장이야 당장 손대기 어렵다면 용산기지부터 모양새 있게 해결해야 국가 체면에 걸맞다.

미군 사용토지의 무상공여를 명문화한 SOFA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국전쟁 시기 황급하게 틀이 짜인 SOFA와 비견되는 불평등협정으로는 에티오피아.미국 협정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던가? 글쎄다. 정권말기라 정신이 없을 터이니 다음을 기다려야 할까□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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