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양곡유통위원들의 항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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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04년에 쌀시장이 개방돼 우리 쌀농업이 위기를 맞으면 누가 책임지죠.농민들도 그때 가서 정부더러 그동안 뭐했냐고 야단쳐도 이미 늦습니다."

6일 양곡유통위원을 사퇴한 사공용 서강대 교수는 정부의 추곡 수매가 동결 방침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그러면서도 司空교수는 수매가에 대한 국회동의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양곡유통위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곡유통위가 건의해도 정치논리에 의해 뒤바뀌는 판인데, 위원회마저 없다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리란 이유에서다.

이번 양곡유통위는 사상 최초로 수매가 인하를 건의, 우리나라 양곡정책에 전환점을 찍는 듯했다. 농림부도 처음에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내년에 논농업직불제 보조금을 올리는 만큼 수매가를 2% 정도 내리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당정협의 및 청와대와 정책을 조율하면서 '물타기'가 시작됐다.여야 의원들도 한결같이 '대책 없는 수매가 인하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정치권의 반응을 의식한 농림부는 복수안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무부처로서 확실한 의견을 내고 관계부처나 정치권을 설득해야 할텐데 결정권을 떠넘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섯시간의 격론 끝에 어렵게 내린 양곡유통위의 건의는 무시됐다.

추곡 수매가 건의로 위원회의 역할이 사실상 끝났는데도 5명의 위원이 굳이 사의를 밝힌 것은 '양정정책이 또 정치논리에 휘둘렸다'는 항의 표시다.

그나마 정부의 동결안이 국회의 동의를 받으리란 보장도 없다. 지방자치단체장과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년에 농민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정부 안에 대한 동의를 거부하고 인상하려 들 수도 있다. 일부 농민단체는 지역구 의원에게 수매가 인상에 찬성한다는 서약을 받을 움직임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다가 쌀시장 개방에 부닥치면 농민들의 고통은 훨씬 심해지고 우리 사회가 부담해야 할 비용도 늘어날 것이다."

사의를 표명한 뒤에도 2004년 쌀시장 개방 재협상 이후를 걱정하는 양곡유통위원의 말을 정부와 정치권,농민 모두 새겨들어야 한다.

정철근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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