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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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하지만 누나들과 내가 군것질 타령을 하면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큰 쌀자루를 지워서 시장통의 뻥튀기하는 아저씨에게 보내곤 했다. 옥수수도 튀기고, 쌀이나 보리도 튀겨 왔다. 무슨 폭탄처럼 생기고 시계와 같은 압력계까지 달린 무쇠 기계를 화덕 위에 올려놓고 빙빙 돌리다가 때가 되면 아저씨가 쇠막대기를 주둥이에 엇갈려 넣고 터뜨릴 자세를 잡는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귀를 막고 멀찍이 물러나고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 귀를 막는다. 펑! 하는 폭음과 함께 흰 김이 피어 오르면서 촘촘한 철사 그물망 속에 고소한 냄새의 튀밥이 가득 찬다. 우리는 추수를 마친 농사꾼들처럼 의기양양하게 부풀어 오른 튀밥 자루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또 왜 그렇게 약장수들이 많았는지. 학교에 오가다가 로터리 부근의 수양버들 우거진 빈터나 역전 광장에 이르면 으레 구경꾼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둘러서 있고, 원숭이 또는 잘 훈련시킨 개나 새 몇 마리, 아니면 소녀를 데리고 약장수가 재간을 부리게 마련이었다. 어떤 사람은 바이올린으로 '양산도'나 '황성 옛터'를 켜고, 또 어떤 이는 마술을 부리고, 아코디언으로 '신라의 달밤'을 연주하고, 등에 질머진 북의 북채에 줄을 매어 발에 매달아 박자를 맞추어 치고 입으로는 하모니카를 부는 일인 악대도 있었다. 재간도 그랬지만 입담은 또 대단해서 사람들은 할 일을 잊고 둘러서서 배를 잡았다.

-내가 누구냐, 성은 진 이름은 짜배기 진짜배기가 바로 나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동경 제국대학 약학과를 앞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뒷문을 살짝 스쳐온 사람이다 이거야. 그러면 이 진짜배기가 날이면 날마다 이 후진 골목에서 떠드느냐, 내일 이 자리에 와서 날 찾아봐, 없어, 옆 골목에 가면 있지만.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배암이야.

내가 나중에 아이들 앞에서 재담꾼 노릇을 하게 된 것도 이 때의 착실한 구경꾼 노릇으로 익힌 솜씨라고나 할까.

기인이나 미친 사람도 많았다. 내가 어디엔가 썼지만 '꼼배네'로 불리던 거리의 가수 부부는 한동안 유명했다.

잠이 깨어 코까지 둘러썼던 이불 사이로 내다보면, 제일 먼저 성에가 두껍게 낀 유리창이 마주 보였다. 여름에 누나들이 창살에 실을 매주어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시들어 말라버려 바람에 불려서 날아가고, 창문마다 예리한 얼음의 꽃이 매달렸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아침 햇볕에 창문의 귀퉁이가 녹아내리면서 작은 얼음의 입자들은 무수한 빛 조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어린이 잡지에서 숨은 그림을 찾을 때처럼, 우리는 유리창 위에서 갖가지 동물과 수풀을 보았다. 어느 때는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물풀이 가득 피었고, 그 사이의 허공 위에서 뿔 돋친 고기들이 날아다녔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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