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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5. 엉터리 수사결과 발표

7월 16일 오후 4시쯤 "검사장이 직접 수사결과를 발표하라"는 대검의 지시를 받았다. 발표상황을 중계방송 하려는지 서울에서 각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내 입으로는 발표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래도 검찰 수뇌부는 계속 "검사장이 직접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할 수 없이 나는 "검사장이 말단 경찰관을 기소유예 한다는 사건발표를 하는 것은 격에도 맞지않고, 외압에 의한 엉터리 결론을 진실한 수사결과라고 TV에 나가 발표할 정도의 '강심장'이 아니다"라고 항변해 버렸다. 실제로 검찰이 발표한 수사결과는 실제와는 사뭇 달랐다.

나중에 대법원이 權양과 변호인단이 낸 재정(裁定)신청을 받아들여 문귀동(文貴童)경장을 재판에 회부한 결정문, 文경장의 유죄를 인정한 판결문에서 인정한 사실관계는 모두 인천지검이 밝혀낸 것이었다.

당시 인천지검은 文경장이 ▶조사실에서 權양의 바지단추를 푼 뒤 지퍼를 내리고 폭언을 했으며▶權양의 상의를 모두 올리게 하고 젖가슴을 만지는 등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인천지검이 대검의 승인을 받아 만든 수사결과 발표문은 실제 수사결과와는 엄청나게 달랐다.

수사 발표에서는 "부천경찰서 조사실은 밖에서 들여다 볼 수 있게 돼있고 당시 다른 경찰관들이 조사실 앞을 지나다닌 상황이어서 성 추행을 할 여건도 안됐다"며 權양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검찰 수뇌부는 끝까지 수사결과 발표를 거부하는 나 대신 김수장(金壽長)특수부장을 발표자로 골랐다. 金부장도 여러번 발표를 거절했으나 어쩔수 없이 악역(惡役)을 맡아야 했다.

그런 사정으로 수사결과 발표는 예정됐던 오후 4시를 훨씬 넘겨 오후 6시30분쯤 시작됐다.

나는 검사장실 문을 잠그고 서울에서 온 법조출입 기자는 물론 어떠한 사람과의 면회도 사절했다.

기자들도 검사장이 발표장에 나오지도 않고 평소 알고 지내온 자신들과의 면회도 사절하자 대충 사정을 짐작하는 듯했다.

그런데 TV 자막에는 사건 발표자가 '김경회 인천지검장'으로 표시돼 있었다.

방송사들은 미리 대검으로부터 인천지검장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것이란 설명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떻든 金부장에게는 평생에 못할 짓을 시킨 셈이 되었다. 비록 내 얼굴이 TV화면이나 신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수사결과 발표 다음날이 제헌절이었다. 머리와 전신이 아파서 오전에는 집에서 쉬고 오후에 청사에 나갔더니 차장과 부장검사들이 출근해 있었다. 오후 3시께 총장의 전화를 받았다."어제 발표에 대해 인천과 서울의 일부 검사들이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공안기관에 감지되니 부하들의 입 단속을 시키라"는 것이다.

지금 이 마당에 지검장이 부하 검사들 입 단속이나 시킬 형편인가. 수채 구멍에 목을 묻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아무리 보안을 당부한들 손바닥으로 하늘을 막는 격이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인천지검이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잘해 진실을 밝혀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수사가 잘 됐으면 무엇 하는가.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는 현실 앞에 너무 무력하고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7월 21일 김수장 특수부장이 자기 사무실로 두통의 협박편지가 왔다며 가지고 왔다.

정말 괴로운 나날이었다. 내 개인의 일로 끝난다면 벌써 어떤 결단이라도 내렸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검찰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이제 정부기관 중에 국민이 믿는 기관이 어디인가. 한심스럽다.

그날 金부장을 데리고 서울 여의도 한식집에 가서 당시 법무부에 근무하던 김경한(金慶漢.현 서울고검장)검사 등 법무부와 대검에 근무하던 몇몇 소장검사들과 저녁을 먹었다.

나는 金검사 등에게 "지금이라도 성 고문 사건이 올바로 처리되도록 각자의 상사들을 설득도 하고 폭발 직전에 있는 인천지검의 심각한 분위기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사 중간발표는 하였으나 아직 그 사건에 대한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건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다는 한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경회 <前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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