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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열 열며] 여론 탓하기에 앞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98년 초로 기억된다. 청와대에서 저녁을 겸해 가진 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오고간 말을 세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경제위기 극복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던 것이 인상에 남아 있다.

그로부터 3년여. 최근 국정홍보처에서 보도참고자료 하나를 보내왔다. 'IMF 4년, 우리 경제가 다시 뜁니다'라는 제목의 이 자료는 그간의 성과를 외환위기 극복, 국가 신인도 회복, 실물경제 회복, 4대개혁 마무리, 새로운 성장기반 마련 등 크게 다섯가지로 요약하고, 이를 상찬(賞讚)한 여러 해외언론의 논평을 맨 뒤에 덧붙이고 있다.

*** “과거 정권때문에 욕먹어”

국정홍보라는 것이 원래 잘한 것을 내세우는 일인 데다, 몇몇 숫자로 뒷받침되듯 나아진 것도 물론 있는 터여서 그 자체로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런 자랑스러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론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우리 언론의 평가는 붙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달 26일 청주에서는 충청북도 업무보고를 겸한 오찬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내에선 여론조사를 해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경제라고 답한다"며 "(이런 엇갈린 평가에 대해) 여러가지 느낌이 많다"고 말했다고 언론(당일자 연합뉴스)은 전했다. 이어 현안인 공적자금과 관련해 "이 정권은 억울하다. 과거 정권이 잘못해 은행들을 부실하게 만들어 무너지게 돼서 공적자금을 썼는데…"라 했다고 덧붙였다.

하루 뒤, 서울에서는 노벨평화상 수상 1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역정을 회고한 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라며 "역사의 평가와 현실적 이익 가운데 역사의 평가를 택하겠다"라 말했다(연합뉴스)고 보도됐다.

말에선 뭐든 느낌이란 게 묻어나게 마련이다. 당시 현장에 있지 않아 단언킨 어렵겠으나 보도된 말들에서 집권 초기 보여준 자신감은 느껴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아쉬움이랄까, 일종의 원(怨)같은 것이 느껴진다.

내부의 평가가, 현세의 평가가 야속하다 느껴질 경우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 외부 평가에 마음을 주고 현실보다 역사에 의탁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인식에서 비롯된다.

물론 외부평가를 낮춰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긴 이 나라 국민의 평가다. 외국언론이 아무리 잘한다 해도, 국내 여론이 잘못하고 있다 한다면 그건 잘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역사의 평가' 또한 중요하며 위정자로서 항상 가슴에 새겨야 할 덕목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세의 평가는 역사의 평가와 반드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잘될 때는 현세의 평가인 '여론'을 등에 업다가도, 여론이 돌아서면 '후세의 평가'운운하며 역사에 의탁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일 뿐이다.

더욱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 및 현재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최근 수십년간 이뤄진 역사학의 성과 중 하나란 점을 생각한다면, 현세의 평가가 바로 '역사의 평가'일 수도 있는 것이다.

*** 현세의 평가를 주목해야

2천수백년 전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백성을 사랑하는 데도 그들이 나를 친밀히 여기지 않을 때는 내 사랑이 부족하지 않은지 반성한다.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나의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지 반성한다(愛人不親 反其仁 治人不治 反其智)".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어떤 일을 했는데 이루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 반성해 그 원인을 모두 자기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고 했다.

위정자는 야속한 인심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 2천수백년의 시간을 격(隔)한 오늘에서인들 그 중요함이야 덜어질 수 있겠는가.

박태욱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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