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8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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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내려달라는 김흔의 말을 듣자 갑자기 낭혜가 우렁찬 목소리로 물어 말하였다.

"태흔이는 혀(舌)를 갖고 있느냐."

느닷없는 질문에 김흔은 망설이다 대답하였다.

"갖고 있습니다."

"어디 한번 보여다오."

하는 수 없이 김흔이 입술을 벌리고 자신의 혓바닥을 밖으로 내보였다.

"과연 태흔이는 혓바닥을 갖고 있음이로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낭혜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혓바닥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무설토(無舌土)가 나의 종지(宗旨)이므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며, 아무런 가르침도 내려줄 수 없음이로다."

불가에서 유설토(有舌土)는 말이나 문자 등을 빌려서 어떤 사물이나 진실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며 무설토는 말이나 문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설토는 교(敎)를 가리키며, 무설토는 선(禪)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낭혜는 자신이 선승이므로 언설(言說)을 빌려서 설명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낭혜는 갑자기 자신의 입을 열어 혀를 불쑥 내밀며 말하였다.

"이게 무엇이냐."

"혀이나이다."

김흔이 대답하자 다시 낭혜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렇다. 그렇다고 조사가 하나의 땅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조사에게도 두가지 땅이 역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법을 구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 무설토이겠으나 그대가 이처럼 찾아와 법을 구하므로 나 역시 혓바닥을 빌려 말을 할 수밖에 없음이로다."

그런 다음 낭혜는 찾아온 김흔과 김양에게 경구 하나를 내려주었다. 그 가르침의 내용이 최치원이 쓴 백월보광탑비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은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너희가 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것이지 어찌 도가 너희를 멀리하겠는가. 설사 농부들일지라도 속세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가면 반드시 마음도 따라오니 도사와 교부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종자가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농부라 할지라도 마음을 잘 살피면 속세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부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몸의 주인인 마음을 잘 살피라는 낭혜의 가르침을 두 사람은 마음 깊이 새겨들었다. 그런 다음 다시 김흔이 말하였다.

"스님, 저희들이 스님을 찾아온 것은 평생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목적이 있어서이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낭혜가 묻자 김흔이 단숨에 대답하였다.

"우리 두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 미리 알고 싶어서이나이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낭혜가 소리치면서 말하였다.

"네 이놈. 이곳이 무슨 점집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느냐."

그 무렵 신라에서는 미신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 사술(邪術)이라 하여서 좌도(左道)라고 불렸는데,이에 관한 내용이 『삼국사기』 흥덕왕조에 기록되어 있다.

"한산주에 살고 있던 요술인(妖術人)이 자칭 빠르게 부자가 되는 술법인 속부술(速富術)을 가르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못 혹신(惑信)하는지라 왕이 듣고 가로되 '사도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은 선왕의 법이다'하고 먼 섬에 귀양을 보냈다."

사기에 기록된대로 자신을 무슨 요인(妖人)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화랑의 태도에 분노한 낭혜가 당장이라도 주장자를 들어 내리칠 기세로 호통을 치며 말하였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김흔이 웃으며 말하였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스님.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다만 월단평뿐이나이다."

월단평(月旦評).이는 '매달 첫날의 평'이라는 뜻으로 '인물에 대한 비평'을 일컫는 말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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