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법 안지키는 입법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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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회의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이 이틀 지났다.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토록 한 헌법 제54조 규정대로라면 2일까지 통과시켰어야 했다. 검찰총장의 국회 출석을 둘러싼 시비 등으로 이러다간 정기국회 회기(9일 종료) 내에 처리하지 못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국회의 이런 처사는 분명 헌법 위반이다. "제54조는 훈시(訓示)규정에 불과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인데 이는 무책임.무원칙의 소치다.

'30일 전'규정은, 정부가 이에 근거해 제대로 실행계획을 세우고 차질없이 집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그 위반을 개의치 않는 자세는 국정을 대충 해도 괜찮다는 얘기나 진배없다.

국회의 헌법 위반 행위에서 더욱 한심하고 걱정스러운 대목은 여야 모두 '죄의식'조차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걸핏하면 성명을 쏟아내는 여야가 법정시한을 넘긴 데 대해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유감성명 하나 안 내는 게 그런 방증이다. 13대 국회 이후 여덟차례나 예산안 법정 기일을 지키지 못했지만 별 문제가 없지 않았느냐는 투다.

불가피한 경우 가(假)예산을 짜 집행하면 된다지만 국민이 용인할 만한 지연사유가 과연 있었는지 정치권은 반성해야 한다. 입법기관이 위법을 서슴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준법(遵法)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주차위반 국회의원 차량에 대한 무더기 과태료 부과에 왜 많은 국민이 환호했는가를 곱씹어 볼 일이다.

시간에 쫓기는 지금 국회는 정략사안은 일단 젖혀두고 계수조정소위 등을 완전가동해야 한다. 거듭 지적해 왔듯 정부 제출 예산안의 방만성.비효율성은 크게 우려되는 수준이다. 원내 다수파인 야당의 책임이 특히 강조되지만 여당인 민주당도 과거처럼 정부를 감싸려고만 해서는 곤란하다.

또 5백60여개 법안을 포함한 6백20여개 안건의 처리 여부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심의가 미흡한 만큼 통과 자체에 욕심을 내선 안된다. 예산안.법안 모두 경제 살리기와 민생에 초점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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