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기미 소비 어떻게 봐야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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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주말인 지난 1일 자정 무렵.

불야성을 이룬 서울 퇴계로 남대문시장 입구에는 지방 도매상인들을 가득 실은 전세버스가 속속 도착해 수십대가 대로변을 가득 메웠다. 남대문시장㈜의 백승학 기획과장은 "지난달 중순부터 지방에서 구매를 위해 올라오는 단체 셔틀버스가 평일 60대 안팎으로 두어달 전보다 20대 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재래시장을 포함해 소비 현장 곳곳에서 활기의 조짐이 엿보이는 것은 최근 경제상황과 맞물려 경기가 나아질지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번지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대만 같은 아시아의 경제 모범국가들이 지난 3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미국.일본 등 선진국 경제도 제자리 걸음을 하는 판에 2%에 가까운 성장을 이어간 한국경제에 그런대로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조업 체감경기는 여전히 저공비행하고 있고, 기업의 투자심리 역시 쉽사리 풀리지 않는 모습이다. 따라서 경기의 U턴을 점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전문가들이 많다.

◇ 소생 기미 보이는 소비현장=대표적 소비 현장인 백화점.할인점의 영업이 잘 되는 것이 소비 회생조짐을 더 느끼게 해준다.

롯데백화점의 올 10월까지 매출신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14%. 하지만 지난달 열흘간의 창립기념 판매행사를 연 결과 2천4백66억원어치가 팔려 전년 동기(1천9백16억원)보다 29%나 늘었다.

할인점 이마트의 이인균 마케팅실장은 "지난달 이후 매출이 꾸준히 늘어 두자릿수 성장을 할 것 같다"고 기대했다.

재래시장과 도매상가.패션몰 등도 이 정도는 아니지만 겨울용품 출시에 때맞춰 매장손님이 늘고 있는 추세다.

AC 닐슨코리아의 신은희 수석부장은 "한두 달마다 전국 57가지 주요 소비재를 조사하고 있는데 이번 가을 이후 생활용품.음료 등을 중심으로 6개월~1년 만에 판매증가세를 보이는 품목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로만손의 이풍우 관리본부장은 "손목시계의 가을철 결혼 특수가 예년에 비해 별 것 없다 싶었는데 10월 이후 매출이 30% 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9.11 미 테러사건 이후 급감했던 해외 여행객 수도 동남아 등지를 중심으로 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지난 10월 동남아노선 탑승률은 61%까지 떨어졌다가 지난달 76%로 회복됐다.

주요 수출품목의 활기 역시 경기회복 기대감을 통해 소비심리를 부추기게 하는 요인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박막액정 표시장치(TFT-LCD) 등 수출효자 품목의 국제시세가 지난달부터 반등하면서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체들의 매출이 지난달을 고비로 1년여 만에 늘기 시작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PC 조립업체들 간에 거래되는 1백28메가 D램 모듈(8개 칩을 결합한 것)값도 지난달 초 1만2천원대이던 것이 두배 수준으로 뛰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전국 25개 주요 공단의 평균 가동률이 지난 9월 81.2%,10월 82.7%로 석달 만에 오름세를 이어갔다.

◇ 경기회복 판단은 아직 일러=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곧바로 설비투자.수출 회복을 포함한 국내 경기의 전반적인 상승으로 이어질지에 대해선 유보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엄기웅 상무는 "소비.건설투자와 주식시장의 분위기를 놓고 경기 바닥론이 나오지만 대다수 기업들은 세계 경기 등 대내외 경제여건이 쉽사리 호전되기 어렵다고 보고 여전히 움츠린 상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대한상의가 2일 내놓은 내년 1분기 제조업 경기실사지수(BSI)를 보면 올 4분기보다 더 비관적이다.

지난달 중순부터 국내 1천4백85개 제조업체를 조사해 봤더니 올 4분기(86)보다 낮은 80을 기록한 것. BSI가 100 이하면 경기가 나빠질 것으로 느끼는 쪽이 더 많다는 뜻이다.

BSI를 항목별로 뜯어 보면 내년 1분기 기업들의 운신의 폭도 가늠할 수 있다. 내수(84).수출(89)의 감소로 생산량(89).설비가동률(89)이 올 4분기보다 부진할 것이란 예상이다. 경상이익(72)이 줄고 자금사정(77).판매가격(79)도 악화할 것으로 기업들은 점쳤다.

지난 3분기 우리 경제를 이끈 소비가 일부 돈 있는 계층이 주도한 불안한 구조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3분기 민간소비를 분석해 보면 소득격차에 따른 양극화가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국산제품의 소비증가율이 2.7%에 그친 반면 대형.고급품 위주의 외제 소비는 13.8%나 늘었다.

주부 조모(36.여)씨는 "고급품을 파는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의 10년 단골이지만 지난달 정기세일 때처럼 승강기 타기조차 힘들 정도로 붐빈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하지만 우리 동네(논현동)의 보통 가게와 음식점들은 매출이 30% 줄었다고 울상인 곳이 많다"고 말했다.

정한영 한국금융연구원 경제동향팀장은 "경제성장이 4%대는 돼야 수출 부진을 상쇄할 만큼의 소비.투자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내수 진작책과 함께 기업들도 너무 신중한 자세에서 벗어나 투자를 늘릴 때"라고 덧붙였다.

홍승일.정경민.이승녕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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