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울림으로 '전쟁 아픔' 드러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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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폭탄을 비처럼 떨어뜨리는 폭격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수십대의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항공모함도 나오지 않는다. 무참히 살해된 사람들을 클로즈업하는 고발성도 생략됐다. 하지만 울림은 넓고 깊다. 전쟁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사진)는 연극으로 치면 부조리극에 해당하는 영화다.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세상, 그 중에서도 인간의 욕망과 우매함이 집결된 전쟁을 마음먹고 비틀어본 수작이다.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웅대한 스케일은 볼 수 없으나 대신 그 어떤 영화보다 뚜렷하게 전쟁의 공허함을 각인시킨다.

'노 맨스 랜드'의 장면 장면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혼란스럽다. 분명 웃음은 나오는데 애잔한 슬픔이 바로 뒤따라 붙는다. 예컨대 이렇다. 한 동네에 살았던 주민들이 서로 총을 맞대고 싸우는 긴박한 상황에서 한 병사가 시사 잡지를 꺼내며 아프리카 르완다 유혈 사태를 걱정한다. 내 집의 쌀통이 텅 비어 있는데 남의 집에 연탄이 떨어진 걸 불쌍해 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 이 대목은 어떤가. 고성능 지뢰 위에 한 병사가 누워 있다. 몸만 조금 움직여도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절박한 순간이다. 그런데 담배 한 모금을 얻어 피운 그가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또 '큰일'을 보고 싶다고 울어댄다. 만약 당신이 그 병사 곁에 있다면?

'노 맨스 랜드'의 배경은 보스니아 내전.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줄을 그어 놓고 "이쪽으로 넘어오면 혼내줄 거야"식으로 함께 살던 마을 한곳에 참호를 파놓고 서로 넘어오지 못하게 한 무슬림계와 세르비아계 군인의 대치를 희화화했다. 마을을 갈라놓은 참호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슬림계 민병대와 세르비아계 군인의 갈등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이들을 구출하려는 유엔군 소속 프랑스 장교의 활약, 그리고 특종을 낚아채려는 방송사들의 취재 경쟁 등을 겹쳐놓았다.

영화에선 모든 게 우스꽝스럽다. 두 병사는 서로 총을 뺏고 빼앗기며 상대방에게 '전쟁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들 중간에는 지뢰를 깔고 누운 '제3의 병사'가 있고, 긴급 투입된 유엔군 산하 독일병사는 지뢰 제거에 실패하고, 유엔군과 보스니아군 사이에는 말이 통하지 않고 등등.

보스니아 출신의 감독 다니스 타노비치는 특히 막판에 분위기를 180도 돌려놓는다. 그전까지 가볍고 황당하게 놀려 댔던 분위기를 순간 냉동시킨다. 보스니아판 '공동경비구역 JSA' 같으면서도 유머는 더 신랄하고 비장감은 더 깊은 것 같다. 2001년 칸영화제 각본상, 2002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다음달 3일 개봉. 전체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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