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외로운 노인들의 '수호천사' 임춘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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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냉방에 계시면 어떻게 해요.”

28일 오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의 한 비좁은 단칸방.선옥순(85)할머니가 12년째 간경화로 고생하는 아들(66)과 단 둘이 살고 있는 곳이다.

양손에 쌀 ·김치 등 식료품을 든 임춘순(43 ·여)씨는 방문을 들어서기 무섭게 이불속으로 손을 넣으며 난방부터 걱정한다.

“전기요금 걱정말고 난로라도 피우세요.”

林씨의 말에 할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진다.벌써 4년째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집안 살림을 챙겨주는 林씨가 고맙고,미안해서다.

잠시 후 할머니 집을 나선 林씨가 찾은 곳은 인근의 김병문(75)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월세방.문을 열자마자 악취가 코를 찌른다.심한 중풍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이불에 ‘볼 일’을 본 것이다.

아무말 없이 이불을 걷어 찬물에 빨래를 하는 그녀에게 할아버지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그냥 둬도 되는데…”라며 미안해 한다.

林씨가 상대원동 일대의 독거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은 1994년.지난 7년동안 그녀가 아무런 대가없이 식료품을 챙겨주고 이발 ·청소 ·병원 모셔가기 등의 뒷바라지를 해 온 노인들은 모두 2백여명에 달한다.

그동안 손수 장례를 치른 노인만도 20여명.자식들에게 버림받고 한밤중에 투신자살 소동을 벌인 할머니를 설득하거나 손녀딸의 어머니를 찾아달라는 한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몇달씩 호적기록을 뒤진 일도 한두번이 아니다.이제는 길잃은 치매노인이 나타나면 동사무소 ·파출소 등에서도 林씨를 먼저 찾을 정도다.

그녀가 노인대상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정신병을 앓다 자신이 13세때 가출한 친정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전국을 헤매고도 아버지를 찾지 못한 그녀는 “주위의 어르신들을 친아버지·어머니처럼 여기겠다”고 결심했다.아버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자신과 같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로운 봉사활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97년.이때부터 林씨와 뜻을 같이하는 동네주부들이 하나 둘 모여 이제는 자원봉사자 수가 30여명으로 불었다.

매달 쌀 1백㎏을 지원해주는 독지가도 나타났다.경기도가 지난해부터 ‘가정도우미’제도를 만들어 자원봉사자들에게 하루 1만5천원을 지급하고 있는 것도 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

林씨는 최근 봉사의 범위를 소년소녀가장·장애인 등으로 넓히고 있다.독거노인 외에도 주위에 어려운 이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3년여 동안 林씨의 도움을 받다 지난 23일 만성 신부전증으로 숨진 張모(34)씨는 ‘林씨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지만 가진 것이 없어 장기를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겨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택시운전을 하는 남편과 함께 전셋집을 전전하다 지난 7월에야 20평대 연립주택을 마련한 林씨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어려운 이웃을 돌볼 것”이라며 봉사활동 의지를 다졌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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