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정치 알레르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신체적 알레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치 알레르기’다. 정치 알레르기는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정치 알레르기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미국의 경우 지난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부시 알레르기’가 유행했는데 지금은 ‘오바마 알레르기’가 창궐하고 있다. 상당수 미국인들이 오바마가 미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런 웃음거리도 있었다. 지난 2월 백악관을 방문한 롭 포트라는 보수주의자는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가 사회주의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증거 사진’을 올렸다. 사진에는 백악관 서가에 꽂혀 있는 『미국 사회주의 운동 1897~1912』 『미국 공산주의의 사회적 기반』 등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서적들은 1963년 재클린 케네디가 예일대 사서에게 부탁해 구입한 책들 중 일부였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에서 상대편 정파에 대한 ‘정치 알레르기’가 자신이 속한 정파에 대한 ‘정치 순혈(純血)주의’로 진화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공화당에서는 유타주의 로버트 베넷 상원의원이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초당(超黨)적인 의정활동을 했다는 게 탈락한 이유 중 하나였다. 민주당에서는 아칸소주의 블랑시 링컨 상원의원이 심각한 당내 도전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 정치 순혈주의는 이민자·세금·총기·낙태·환경 문제들에 대해 정파적 입장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을 근거로 대처해야 할 기후변화 문제도 정치화(politicization)돼 있다. 리버럴의 74%가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지만 보수주의자의 경우는 30%에 불과하다. 사석에서는 상대편 정파를 ‘파시스트’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까지 있다. 데이트 상대나 배우자로 정파가 다르면 께름칙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있다. 민주·공화 양당 내에도 좌파·중도·우파가 공존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어떤가. 신체적 알레르기나 정치 알레르기나 미국과 닮은꼴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 인구의 15∼20%인 600만 명이 알레르기 질환을 앓고 있다. 북한·촛불시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보인다. 특정 정치인이 TV에 나오면 꺼버리거나 채널을 돌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됐다.

이번 지방 선거를 앞두고 찍지 말아야 할 후보 유형이 떠오르고 있다. 붙고 보자며 대통령도 실천하기 힘든 공약을 내세우는 후보, 철새 정치인, 비리에 연루됐던 사람 등. 이러저러한 후보를 찍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후보를 찍어야 할지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정파와 대화하겠다” “다른 정당 주장을 경청하겠다”는 후보를 찍어야 하지 않을까. 유권자 자신이 정치 알레르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4대 강, 천안함 침몰, 세종시 등의 사안에 대해 상대편 이야기를 들어 보자. 있지도 않은 알레르기 때문에 몸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정치 알레르기에도 오진이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청결한 환경은 알레르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은 알레르기 원인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알레르기에 더욱 취약해진다. 악순환이다. 정치 알레르기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다양한 의견의 공존과 수용이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