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Champions ① 크루셜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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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셜텍 안건준 대표가 충남 아산의 공장에서 자 사의 광학트랙패드(OTP)가 들어간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안성식 기자]

작지만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들이 있습니다. 히든챔피언을 꿈꾸는 곳입니다. 이런 기업이 많아야 수출도 늘고 일자리도 늡니다. 이들이 어떻게 기술 경쟁력을 확보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는지 최고경영자(CEO)에게 직접 들어보는 기회를 10회의 시리즈를 통해 마련합니다. 또 이들 기업이 계속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수출입은행 심사역과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통해 알아봤습니다. ‘이노패스트 15’와 ‘턴어라운드 - 위기 딛고 선 기업들’에 이은 ‘한국 기업을 말하다’의 세 번째 시리즈입니다.

“회사가 작을 뿐이지 사람이 작은 게 아닙니다.”

휴대전화용 입력장치인 광학트랙패드(OTP)를 만드는 크루셜텍의 창업자 안건준(45) 대표의 말이다. 규모는 작지만 목표와 자세만은 중소기업이 아니라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우린 부품업체이긴 하지만 대기업의 하청업체는 아니다”고 회사를 소개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주력제품인 OTP는 이 회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그것도 광마우스의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HP가 개발하려다 실패한 제품이다. 안 대표는 이 분야에서만큼은 크루셜텍이 시장을 만들어 왔다고 자부한다. 안 대표는 “정밀한 광(光)나노 기술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산학협력으로 발돋움=삼성종합기술원에서 나노 기술을 개발하던 그는 2001년 창업을 결심하고 충남 아산의 호서대에 회사를 차렸다. 이때 산학협력의 덕을 톡톡히 봤다. 서울에서 비슷한 규모의 공장을 세우려면 땅값 등으로 30억원 이상이 들었겠지만 호서대에선 한 푼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사업 초기엔 휴대전화로 사진촬영을 할 때 빛을 내주는 LED 플래시를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2006년부터는 OTP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품을 개발하는 것과 상용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상하좌우 버튼을 쓰고 있는 휴대전화 업체에 마우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OTP를 넣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문화를 팔아야 했습니다.”

제품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OTP를 채택했을 때 고객이 얼마나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겠는지를 설득해야 했다는 것이다. 마침 스마트폰 시장이 커지면서 휴대전화 화면의 커서를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OTP의 장점이 부각됐다. 2007년 삼성전자에 처음으로 OTP를 납품한 이후 해외의 휴대전화 제조업체에도 이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큰물에서 놀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애용하는 블랙베리로 유명한 리서치인모션(RIM)에도 크루셜텍의 OTP가 들어간다. 삼성전자와 LG전자·노키아·모토로라·HTC 등 주요 휴대전화 업체 외에 일본의 샤프에도 전자사전에 들어가는 OTP를 공급하고 있다. 주로 해외 메이커에 납품하다 보니 지난해 크루셜텍의 수출 비중(삼성·LG의 수출제품에 들어간 것 포함)은 96%에 달했다.

글로벌 업체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크루셜텍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일본 샤프에 전자사전용 OTP를 공급할 때였다.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데 정한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불량으로 취급받았다. 일본 업체 특유의 까다로움이었다. RIM에 납품할 때는 국제표준화기구(ISO)의 기준을 철저히 지켜야 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문업체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회사와 직원들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2007년을 기점으로 회사의 매출액은 급성장했다. 52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2009년 622억원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두 배 이상 불어난 13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안 대표가 생각하는 OTP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IPTV(인터넷TV)가 더 많이 보급될 경우 리모컨에도 커서를 움직일 수 있는 OTP가 채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OTP 분야에서 크루셜텍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95%에 달한다. 대만에도 OTP 메이커가 있지만 원천기술이 없어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게 안 대표의 설명이다. 다른 회사들이 뛰어든다고 해도 원천기술은 크루셜텍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우위가 있다는 것이다. 크루셜텍이 보유한 특허 등 지적재산권은 235건에 달한다.

◆기술을 파고들다=회사는 철저하게 광나노 기술에 집중하고 있다. 중소기업으로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규직 직원 248명 중 연구인력이 120명에 달한다.

“2003년부터 100억원을 투자받아 연구원의 인건비로만 썼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제품과 기술입니다.”

안 대표는 또 다른 중소기업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허팀을 뒀다. 직원만 7명이다. 외국의 대형업체들이 특허 공세를 펼 것에 대비해 방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OTP 원천기술을 채용한 제품이 확산됐을 때 상대방 업체를 상대로 공격적인 특허 소송을 내기 위한 것이다. 제품의 원천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이다.

그가 꿈꾸는 크루셜텍의 미래는 광나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입력기기 분야의 히든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안 대표는 2008년 『히든챔피언』이란 책을 회사 임직원들에게 선물했다. 지난 3월 수출입은행으로부터 한국형 히든챔피언 육성기업으로 선정됐지만 히든챔피언을 향한 그의 꿈은 이미 2년 전 시작됐던 것이다.

◆철저히 집중하다=“대기업처럼 브랜드를 키운다는 욕심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 하겠다고 나서기보다는 글로벌 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할 겁니다.”

안 대표가 말하는 글로벌 메이커와의 협력, 이 또한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이다. 크루셜텍은 OTP의 원재료를 미국의 HP에서 수입한다. 원재료를 직접 만들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글로벌 기업과 직접 경쟁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보다는 가장 좋은 재료를 받아다 가장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자”고 강조한다. 남이 간 길을 가면 쉽지만 먹을 게 없다는 것이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면 힘들긴 하지만 열매가 너무 달고 크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OTP 시장이 다소 늦게 활성화된 것을 빼면 사업을 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다고 했다. 안 대표는 “사업 초기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경영자”라고 단언했다. 그의 회사는 올해 7월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글=김원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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