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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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23. 불효

성철 스님이 늘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가 세속과의 인연끊기다.

"사람이 한번 결심해서 출가를 했으면 앞으로만 봐야지 뒤돌아 보면 못쓰는 거라. 그러니 출가한 후에도 속가집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꼴 보기 싫기 이전에 그라믄 안되는 거라. 이왕 출가했으면 가족들 인연은 끊고 살아야제."

성철 스님의 말씀이 그러니 겁이 바짝 들어 있는 나는 행자시절이나 초년병 시절 집 생각일랑 해볼 수도 없었다. 대신 어머니가 가끔 찾아와 만나곤 했다. 처음에는 나를 데리러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어머니인데 그나마 가끔씩 찾아와도 성철 스님한테 꾸중을 듣긴 마찬가지였다.

"자식 출가했으믄 그만이지 뭘 자꾸 찾아와!"

결국 어머니는 나를 찾아와도 백련암으로 오지는 못하고 그 밑 사하촌에서 몰래 전화해서는 "나 왔데이"하고는 끊었다. 그럴 땐 모른 척하고 산을 내려가 얼굴만 보고 돌아오곤 했다. 그나마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도 띄엄띄엄 줄어져갔다.

한번은 내가 성철 스님 몰래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적도 있다. 보통 불교신도들은 남의 자식이 스님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자기 자식이 출가한다고 하면 한 길이나 펄쩍 뛰기 마련이다. 출가한 뒤에 어머니는 찾아오기라도 하지만 아버지는 섭섭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한번은 나의 아버지가 "중 된 미운 자식이라 나는 보러 가기도 싫다. 그렇지만 아들인 지는 한번이라도 왔다가야지, 지 애비하고 무신 원수졌다고 한 번도 안 오나"고 섭섭해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또 "중이 매몰스럽기는 매몰스럽운 거라"면서 하도 서운해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찾아가 인사했다.

이후에도 누구는 어머니 환갑을 어떻게 했네, 아버지 칠순을 어떻게 했네 하는 소문들이 들려오곤 할 때마다 부모님께 죄송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1982년 12월 큰스님 심부름으로 서울 왔다가 바쁘게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백련암에서 날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기에 수화기를 들었다. 시자(侍者.큰스님 시중 드는 스님)스님이 "큰스님께서 직접 통화하시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해인사에 무슨 큰일이 생겼나보다고 생각하던 중 큰스님 목소리가 들여왔다.

"원택이가. 너거 아배 죽었다칸다. 백련암으로 오지말고 대구 가서 초상 치고 들어오이라. 내가 직접 전화 안하면 니 안갈 꺼 같으니께 내가 전화한 기라. 니, 내 말 알겠제. 꼭 대구 가거라. 어-잉. 내 말 들어라."

그 순간 몹시 불효한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그 길로 바로 대구로 내려가 형님댁을 찾아드니 형님은 중동에 가고 없고 집안이 썰렁했다. 갑자기 당한 일이고 형색이 스님이니 동창들에게 알린다는 것도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가족끼리만 장례를 치렀다.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거적대기에 둘둘 말아 장사지낸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라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그로부터 4년 뒤,그때까지도 날 찾아오면 늘 "니 언제 장가 갈라카노"하는 원망이자 당부를 잊지않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신도들도 알고 찾아와 문상해주고, 해인사 스님들도 문상을 해주어 아버지 출상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덜 무거웠다.

그래도 나는 성철 스님과 비교하면 호강한 셈이다. 큰스님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장례에 가지 않았다. 대신 시자를 보내 문상을 했을뿐 평생 고향(경남 산청군)을 찾지 않았다. 하도 궁금해 "고향을 찾지 않으신 이유가 있십니꺼□" 물은 적이 있다.

성철 스님이 힐껏 쳐다보며 툭 내뱉었다.

"아따, 니 고향은 어지간히 대단한 모양이제.이놈아, 중이 돼 떠났으면 머무는 곳이 고향이지 중한테 갈 고향이 따로 어데 있단 말이고."

성철 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본인은 부모의 상을 당하고도 문상조차 않는 삶을 살면서도 제자인 나에게는 직접 전화를 걸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라고 신신 당부까지 하다니.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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