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라이프] 한 지붕 다섯 이방인의 신촌블루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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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타국(他國)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고달프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유학생들은 더욱 그러하다. 한국에 공부하러 오는 외국인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요즘, 그들은 이 한국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서울 신촌의 하숙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학생 5명을 통해 한국에서의 하숙 생활과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 사람들을 엿본다.

#옛 소련에서 온 두 처녀

우리는 발렌치나 카발축과 코저굴러바 박드굴. 한 방에 살아요. 우리 하숙집에 사는 사람은 10명. 그중 외국 사람이 5명이에요.

일본 고시(考試)공부를 한다는 '일본 아저씨'마코토만 빼고 우리 모두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다녀요. 일본 아저씨는 굉장히 공손해요.

중국 마카오에서 온 여학생은 반말밖에 못하나 봐요. 하숙집 아줌마에게도 반말을 하니 아줌마가 좀 기분나빠하는 눈치예요. 반대로 벤이라는 영국 학생은 존대말밖에 못해요.

하숙집 아줌마는 2층에 딸 둘과 함께 사세요. 내후년이면 70세가 되신다는데 무척 젊어보여요. 아줌마는 좀 무뚝뚝해요. 말을 많이 하시지 않아요. 잘 웃지 않으세요.

하지만 친절한 분이란 걸 알아요. 방에 와서 춥지 않은지 물으시고 두꺼운 이불을 갖다 주셨어요. 코저굴러바가 아팠을 땐 손수 약도 가져다 주셨어요.

앞방에 사는 한국 언니도 너무 친절해요. 우리에게 서울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갖다 줘요. 일본에서 유학한 적이 있어 외국에서 사는 어려움을 잘 안대요. 우리에겐 친언니나 다름없어요.

#중국 아가씨

나는 키니타 설. 미국 LA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한국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한국에 관심이 있어 5월 여기에 왔다.

하숙집은 청소를 안해도 되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하숙집 학생들은 아침식사 시간에 다 함께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난 어학당에서 만난 중국 학생과 사귀고 있다. 그런데 아줌마는 남자친구가 내 방에 놀러 오는 걸 싫어한다. 한번은 아줌마가 나에게 남자친구를 자꾸 데려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 뒤로 남자친구가 오면 신발을 방안에 들여놓고 있다. 하숙집에는 자유가 없다!

한국 남자와는 절대 결혼할 생각이 없다. 전에 있던 하숙집엔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줌마가 모든 일을 하고 아저씨는 텔레비전만 봤다. 한국 여자들은 고생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

#일본 아저씨

제 이름은 고사카 마코토입니다. 저는 일본 와세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본에서 공부하기가 지겨워 한국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왔습니다.

저는 주로 하숙방 안에서 공부를 합니다. 한국법과 일본법이 비슷하다는데,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한국 학생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줌마는 요리를 잘 하십니다. 1층에 사는 러시아 말을 하는 여학생들 얘기로는 아줌마가 저와 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아줌마가 아들이 없는 데다가 벤과 제가 밥을 가장 잘 먹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줌마가 저를 '아저씨'라고 불러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른 두살밖에 안됐는데 '아저씨'라니요!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일본과 꽁치 분쟁이 생겼을 때 모두 일본을 원망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선 한국 입장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한국 어선이 남쿠릴 어장에서 꽁치를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가 여기서 꽁치를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영국 총각

제 이름은 벤 잭슨입니다. 영국 셰필드대에서 한국학을 공부했습니다. 교환학생으로 1년간 여기서 공부할 예정입니다.

하숙집에 처음 와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밥 먹어"입니다. 첫날은 아침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아줌마가 방문을 두드리며 "밥 먹어!"라고 말했는데 못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국에서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만 배웠습니다.

저는 아줌마가 해주시는 음식은 무엇이나 잘 먹습니다. 매운 음식도 좋아합니다. 아줌마는 제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걸 놀라워하십니다.

하숙집 생활에서 불편한 건 목욕입니다. 뜨거운 물이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엔 대중목욕탕에 갔었습니다. 한마디로 천국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일하고 싶습니다.

김현경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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