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기름값이 서울보다 200원 싼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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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지난 주말 경기도 용인에 다녀왔다. 따뜻한 봄 날씨만큼이나 싼 기름 값에 기분이 좋았다. 한 집 걸러 하나꼴로 L당 1600원대에 휘발유를 팔고 있었다. 서울 용산구청 주변 주유소의 휘발유 판매가격은 1900원 안팎. 가장 싼 곳이래야 1815원이다. 용인 지역의 기름 값이 싼 이유 중 하나가 대형마트 주유소다. 한국석유공사의 주유소 종합정보 시스템인 오피넷(www.opinet.co.kr)에서 확인해 보니 이마트 구성점과 롯데마트 수지점에서 1659원에 휘발유를 팔고 있다. 그러니 근처 주유소들도 값을 내릴 수밖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느냐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L당 200원 이상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에 여덟 개의 대형마트 주유소가 문을 열었다. 아쉽게도 서울이나 부산에는 한 군데도 없다. 대형마트마다 하나씩 생겼으면 싶은데 도통 늘어나지를 않는다. 지방자치단체가 대형마트의 설립 신청을 잇따라 반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광주시와 순천시는 각각 지난해 롯데마트와 이마트가 신청한 주유소 건축허가를 불허했다. 광주지방법원은 이달 초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 판결을 거쳐 실제 문을 열 때까지 1~2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주유소협회는 지난해 8월 대형마트 주유소가 근처 주유소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며 중소기업청에 사업조정을 신청했다. 협상을 하라며 해를 넘긴 중기청은 이달 6일로 예정됐던 강제조정도 뚜렷한 이유 없이 연기했다. 지자체나 중기청이나 “지역 여론 때문”이라고 말한다. 싼 주유소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는 운전자도 있는 건지, 내 나쁜 머리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업들 간에, 혹은 기업과 소비자 간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산업 현장에서 정부의 역할은 모호할 때가 많다. 손해를 보는 쪽에서는 “정부는 뭐 하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익을 보는 쪽에서도 치열한 경쟁보다는 내심 ‘적절한 조정’을 바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방송통신위원회는 “과도한 마케팅 비용을 줄여 콘텐트·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며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KT·SK텔레콤 등이 총 매출액의 22%만 단말기 보조금 등으로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명분은 선하고 정의롭다. 과열 경쟁을 줄여 통신비를 낮춰주겠다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나.

하지만 마케팅비 제한이 휴대전화 기본료나 통화료 인하로 이어진 적이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차라리 비싼 단말기나 보조금을 듬뿍 받아 싸게 사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투자 확대로 이어져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KT 사장 출신인 이용경 의원은 “이미 애플과 구글이 우리나라 IT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데 방통위는 20~22% 숫자놀음이나 하며 도토리 키 재기나 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신업체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정부 규제 때문에 사업 못 하겠다고 하면서 자사에 유리하면 찬성하고 불리하면 규제 운운한다. 대체 언제까지 규제에 편승해 사업할 것인가. 이래서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들어 정보통신부를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세계 최고 수준이던 IT 분야의 위상이 몇 년 새 추락한 것은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통부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2006년 통신·방송 융합(컨버전스)을 취재하다 만난 사이먼 윌키 남가주대(USC) 교수(통신정책연구소장)는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 인프라를 갖췄지만 정부의 사일로식 규제(방송·유선·무선·인터넷 등을 분야별로 나눠 상호 서비스를 막는 것)로 인터넷전화(VoIP)나 인터넷TV(IPTV) 등의 첨단 서비스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8년 정통부가 해체되고 2009년 KT와 KTF가 합병된 이후의 일이다.

기름 값을 끌어내리는 것은 정부의 엄포가 아니라 대형마트 주유소다. 벨소리 하나 내려받으려면 1만원이 들던 무시무시한 무선데이터 요금은 애플 아이폰이 들어오면서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시장을 ‘자의적으로’ 이끌고 이해 상충을 ‘적당히’ 조정하는 정부의 개입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주유소에 안전상의 문제는 없는지, 통신 약관에 불합리한 조항은 없는지 점검하는 심판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 축구장에서 선수들 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심판이 공을 찰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경제부문 차장 kcwss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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