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30권으로 지낸 강원도 산골의 추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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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35면

헌책방 탐방은 한가로운 회고적 문화 산책이자 지식 소유욕의 저렴한 충족이다. 헌책방은 대학 시절 무지무지 가난했던 한 동창의 치열담도 생각나게 한다.

법대 2학년 때 전공 수업들이 시작됐다. 교재인 법서(法書)들은 당시에도 무척 비쌌던 걸로 기억된다. 과외금지로 일자리가 모두 끊어지면서 차비도 궁하던 시절. 그 친구로서는 법서들을 일거에 장만하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동분서주 끝에 간신히 주변의 도움으로 새 책들을 구한 날 그는 천하를 얻은 듯 기뻐했다. 다만 법전은 돈이 모자라 기본 6법전서만 복사점에서 복사를 했단다. 신학기 민법총칙 강의 시간, 매사 열심인 그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은 법전 대신 프린트물을 달랑 들고 있는 앞줄 학생이 눈에 거슬리셨나보다. 무거운 법전을 들고 다니기 싫어 요령을 피운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친구는 정신 상태가 썩었다는 꾸지람을 듣고 그만 교실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내내 마음 불편한 수업을 마치고 나가 보니 그는 풀 죽어 복도 구석에 서 있었다. 교실 문에 귀를 대고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어떡하니?” “돈 모아 사야지 뭘.” 천성이 원래 맑은 친구는 별일 없다는 듯 대답했지만 멈칫 돌아서는 눈시울 그림자에 이슬이 고랑 맺혔다. 며칠 지나 그에게 또 ‘사건’이 생겼다. 불운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눈물겨운 그 책들 일습을 홀랑 도둑맞았던 것이다. 도서관 열람실 책상 위에 고이 모셔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의 일이었다. 요새도 대학 도서관 책 도둑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런 자들이 성업 중이었다. 하필 그의 책을…. 필경 좌절했으리라. 그는 그날 이후로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직업 때문인지, 친구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책은 생명과 같다고 느낀다. 그 이듬해 여름, 나는 책 삼십 권을 들쳐 메고 청량리역 대합실로 갔다. 벼랑 끝에 선 마음으로 어머니와,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밤차를 탔다. 어머니는 그날 이별을 지금도 마음 아파하신다. 강원도 산골, 벌레들을 벗 삼아 지새운 그 여름은 외로움과 그리움, 또 나태와의 한판 싸움이었다. 귀뚜라미 울음이 진해질 무렵 수십 권의 책들을 머릿속에 넣었다고 착각하고 속세로 하산했다. 그 책들로 인해 내 정의감의 기준이 마련됐고 삶의 표준이 설정됐다. 그들 때문에 나는 생업을 가지게 됐고 지금 먹고살고 있다. 나는 설익은 고시 합격기에 그 시절 책들을 대화의 상대로 삼았다고 적었다.

요샌 좀 더 넓게 책 사고, 보고, 읽는 재미로 산다. 책 읽는 인간, 호모 리더스. 읽는 행위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가 근무하는 이곳 경기도 일산, 고양 지역은 공공 도서관 시스템이 매우 발달해 있다. 잘 정비된 열두 곳의 시립도서관이 운영 중이다. 도서관마다 10만 권 안팎의 장서를 자랑한다. 한 번에 다섯 권을 빌려 읽고 호수공원 산책으로 머리를 식히면 두 주가 훌렁 가버린다.

일간지 토요 북섹션도 흥미 만점이다. 다른 사무실 일간지까지 모두 긁어 모아 여덟 군데 신문들의 신간 소개란을 스크랩한다. 언뜻 대동소이해 보이지만 잘 뜯어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주말 탐구생활을 즐길 수 있다. 신문별로 평자들의 관심과 취향에 멋과 맛이 깊다. 같은 책이라도 소개에 이르는 접근 방식과 찍어주는 방점이 저마다 다르다. 이 시대의 아름다움과 아픔을 트렌디하게 감지할 수 있다. 신간 소개에 더해 관련 서적의 흐름까지 짚어 주면 금상첨화겠다.

이제 책을 사야 할 이유와 마주한다. 바로 사서 읽을 책, 찜해두었다 나중에 할인가로 사서 여유 있게 읽어 볼 책. 목록을 만들다 보면 삼사십 권은 족히 쌓인다. 성마른 지름신 때문에 서점으로 달려가고, 인터넷 쇼핑몰을 뒤진다. 새로 사온 책들을 쌓아 놓고 읽으며 문화사업 저지레에 대략 난감, 흐뭇해한다. 필시 적독(積讀)이라는 문화병에 걸린 탓이리라. 어느 새 책값이 용돈 소비의 첫머리를 차지한다. 지갑이 얇아진 것에 놀라 헌책방을 기웃거리는 일도 점차 잦아진다. 그러나 어쩌랴. 살아 있는 것도 병이라 이를 고치기 전까지는 이 만행(漫行)의 잔병치레 몸살은 가실 날이 없을 것 같다.

3주가 지나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잃어버렸던 그의 생명들과 함께. 그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의 헌책방 골목골목을 뒤져서 유기됐던 그의 반려를 구해냈던 것이다. 헌책방 주인은 두말없이 그의 책들을 돌려주었단다. 그는 지금 그 책들이 있었기에 아주 부유한 것은 아니라도 중산층 가정을 이루고 살뜰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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