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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살겠다 갈아보자” vs “갈아봤자 더 못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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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왼쪽)과 자유당의 선거 구호.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는 53년 3년간의 전쟁이 정전협정을 통해 막을 내렸지만,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전쟁복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치러졌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듯 ‘못 살겠으니 갈아보자’와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구호가 야당인 민주당과 여당인 자유당 사이에서 경합하면서, 신익희 후보의 급서 이후 이기붕과 장면의 부통령 선거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관권 개입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5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후보에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다. 부정 선거 속에서도 부통령 선거에 집중한 민주당의 노력 덕분이었다.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도록 규정한 헌법으로 인해 81세의 대통령을 모신 자유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또 다른 충격은 진보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의 200만 표가 넘는 득표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낙승이 예상되었지만, 서울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투표자의 3분의1밖에 되지 않았고, 대구·진주·울산·진해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보다 많은 득표를 했다. 또한 경북에서 신익희의 지지표로 추측되는 무효표와 조봉암의 득표를 합친 표의 수가 이승만의 득표수를 앞질렀다. 진보당은 아직 창당도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진보당이 창당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경우 4년 후의 선거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조봉암의 200만 표가 넘는 득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뒤따랐다. 조봉암의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조봉암을 지지하느니 이승만을 지지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 진보당의 표를 지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고 주장했다. 3·15 부정선거로 인해 61년 교수형에 처해진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은 56년 선거에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으며, 부정이 없었다면 조봉암이 승리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3·15 부정선거가 기획된 것은 부통령 선거 때문이 아니라 조봉암의 선전 때문이었다고 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한국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염증이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조봉암의 기호가 1번이었기 때문에 많은 득표가 가능했으며, 조봉암에 대한 지지표의 대부분은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라는 주장도 있다.

조봉암의 200만 표 득표는 결국 58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당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조봉암은 59년 7월 31일 간첩혐의로 처형되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4·19 혁명 이후 정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거나 그 어려운 시대에도 94.4%의 투표율을 자랑했던 높은 민의가 그리울 따름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