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서가/일진전기 최진용 부회장] 무소유를 소유한 ‘오너의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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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뜸 그가 “고민거리가 있다”고 토로했다. 큰아이 학교가 경기도 분당에 있어 그쪽으로 이사했는데 둘째 아이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입학하면서 등·하교 문제로 힘들다는 소리였다. 내가 “서울로 이사를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전세 기간이 내년까지라 그때까진 기다려야 한다”고 답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막 40대 중반을 넘었을 뿐이었지만 우리나라 유력 그룹의 부사장이었다. 게다가 소위 말하는 ‘오너의 자제’라 회사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CEO)로 통했다. 그렇게 잘나가는 그가 ‘전세 기간’에 묶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됐다. 큰아이 학교 때문에 서울의 집을 전세 주고 왔겠거니 짐작하고 “서울 집에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답이 나왔다. “저는 아직 제 집에 살아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설마 집이 없으려고?’라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묻진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더러는 무소유가 참 좋다”고 말했다. 이윽고 대화는 최근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로 이어지게 됐다. 나는 “꼭 읽어 보고 싶었는데 스님의 유언으로 책이 추가로 발행되지 않아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아내가 불교에 관심이 많아 집에 몇 권 있을 테니 한 권을 드리겠다”고 했다. 주위 일행은 “최근 베스트 셀러로 떠오른 『무소유』가 얼마 전 인터넷 경매에서 권당 120만원에 팔렸다”고 하며 모두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읽어 보고 싶은 책을 얻는다는 기쁨보다 ‘지금이 120만원이면 둘수록 가격이 더 오를 테니 땡잡았구나’라는 생각에 소유욕이 슬슬 솟아올랐다.

며칠 뒤 부하 직원을 통해 책이 나에게 전달됐다. 그 직원이 전하길 “부회장님, 전해주시는 분이 그러는데 집에 몇 권이 있는 줄 알았더니 단 한 권뿐이었고, 줄도 그어진 것이니 양해를 부탁 드린다고 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책을 펼치니 중간중간 줄이 그어진 것으로 보아 그의 말대로 직접 읽은 책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에게 즉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주신 책 감사하게 잘 받았습니다. 유감이지만 한 권밖에 없는 책이니 잘 읽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즉시 답을 보내왔다. “아닙니다. 부회장님. 귀한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무소유~.” 아, 이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가! 그는 정말로 소유하고 싶은 친구다.

그가 회장이 되는 날 그룹은 얼마나 훌륭한 기업이 될 것인가! 몇몇 주변인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모두 “자식들을 그 회사에 보내야 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그 책을 정독했다.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듯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즉시 돌려줘야지. 그러나 한 번만 더 읽어 보고.’ 그 뒤로도 한 달이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책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소유와 무소유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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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일진전기 대표이사부회장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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