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연착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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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라이트 형제가 미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해안의 밋밋한 모래언덕에서 인류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날은 1903년 12월 17일이었다.동생 오빌이 12초 동안 36m, 형 윌버가 59초 동안 2백60m를 날았다.

라이트 형제가 탔던 겹날개 비행기 '플라이어'에는 이.착륙용으로 바퀴가 아닌 스키 모양의 장치를 달았다. 되도록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륙할 때는 나무로 만든 레일을 이용했고, 착륙시에는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다가 멈추도록 설계했다. 덕분에 라이트 형제는 착륙할 때마다 거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실제로 부상도 잦았다. 그래도 역사가들은 이들이 매우 운이 좋았다고 본다.

비행기가 연(軟)착륙하려면 가능한 한 저속으로 착지(着地)해야 한다. 여기에 비행기의 중량.풍속.날씨 같은 요인이 작용한다. 영화 '다이하드 2'에는 테러리스트들이 착륙하는 여객기에 거짓정보를 전달해 고도를 착각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 비행기는 지면과 충돌해 폭발하고 만다.

현대의 조종사들은 착륙에 앞서 주변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가운데 먼저 엔진출력을 낮춘다. 완만하게 하강하다 공항이 다가오면 출력을 더 떨어뜨리고, 승강타를 조작해 날개의 영각(迎角.날개와 앞쪽에서 달려오는 기류 사이의 각도)을 크게 한다.

활주로에 들어서기 직전 영각을 최대로 하면 비행기가 최저속도로 떠있는 상태가 된다. 이어 뒷바퀴가 먼저 활주로에 닿고, 곧 앞바퀴도 닿으면서 비행기는 수평상태로 대지를 달리게 된다. 역추진 장치를 가동하고,잠시 후 바퀴에 브레이크를 걸면 연착륙 성공이다.

우리 정권교체의 역사는 비행기에 비유하자면 '경(硬)착륙'의 연속이었다. 총소리.감옥행에다 전임자를 부정.매도하기 일색이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서진영 교수(고려대)의 회고담을 빌리자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의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과욕 부리지 않고 지금까지 한 일을 마무리해 다음 정권에 부담이 안되도록 하겠다"고 잇따라 다짐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다.

일각에서 '대형 꼼수(?)'일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삐딱한 시선이지 않을까. 아무튼 '연착륙 정권교체'가 현실화된다면 이는 金대통령의 또다른 업적으로 기록될 만하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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