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PGA] "2등이 어때서요 난 열심히 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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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미국 골프선수 데이비드 듀발, 미국 메이저리그의 새미 소사(시카고 화이트삭스), 한국 정가(政街)의 거물 JP의 공통점은.

'넘버1'의 자리에 오를 듯하면서도 주변에서 맴돌고 있는 대표적인 2인자들이다.

듀발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의 영광을 빛낸 그림자에 불과했고 소사 역시 1998년 홈런왕 마크 맥과이어(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올시즌 홈런왕에 오른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그늘에 가려 2인자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JP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올시즌 국내 여자프로골프에선 정일미(29.한솔)가 그렇다. 정일미는 95년 프로무대에 데뷔한 뒤 통산 4승을 거뒀고, 99년과 2000년엔 2년 연속 상금왕에 올랐던 한국 여자골프의 최고 스타다.

그러나 올 시즌엔 16차례의 대회에 출전, 우승은 한차례도 하지 못하고 준우승만 일곱번에 머물렀다. 넘버1에서 2인자로 전락한 소회가 남다를 듯하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 2인자의 철학

'상처난 데 소금 뿌리는 격 아닐까'하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의기소침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목소리부터 쾌활하다.

"2등을 일곱번이나 했는데 대단한 거 아닌가요. 상금도 지난해보다 5백만원이나 늘었는데요. 이만큼 잘 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정일미는 올시즌 1억4천3백90만원의 상금을 챙겨 상금랭킹도 강수연(25)에 이어 2위에 올랐다.1등이 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위로받을 처지는 아니라는 설명에 수긍이 간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잖아요. 당당한 2등이 되자고 결심했지요."

거침없는 2인자의 철학이 쏟아져 나온다.

"남아공의 어니 엘스를 무척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타이거 우즈와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실망했어요. 졌다고 해서 막판에 무성의한 퍼팅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저러지 말자. 2등이 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져먹었지요."

그래서 팬이 많은 걸까. 지난 11일 끝난 파라다이스 오픈 때도 많은 갤러리가 정일미의 플레이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 눈물에 대하여

그래서 그런지 올시즌 전반까지는 가끔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정일미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세번째 준우승에 머무른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울기도 했어요. 그러나 더 이상 울지 않아요."

시즌 일곱번째 준우승이 결정된 뒤에도 정일미는 눈물 대신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눈물을 보이면 아무런 도움이 안돼요. 오히려 상대방 선수의 기를 살려줄 뿐이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웃으면서 부진의 원인을 분석하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고 노력해요."

눈물 대신 보이는 그녀의 미소는 좌절을 이겨내려는 몸짓이었다. '스마일 퀸'이라는 별명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 퍼팅이 뭐길래

유난히 2등이 잦았던 이유가 있을까.

"기록으로 분석하면 퍼팅이 안됐기 때문이지요. 파온(파를 앞두고 그린 위에 공을 올리는 것) 비율은 전체 선수 중 1등이거든요. 그런데 번번이 퍼팅이 빗나갔어요."

스스로의 분석대로 퍼팅이 '아킬레스건'이었다. 정일미는 올시즌 라운드당 평균 31.9개의 퍼트를 기록, 이 부문 16위에 머물렀다.

"기술적인 면 외에도 정신적으로도 자만감에 도취돼 있던 점을 부인할 수 없어요. 2년 연속 상금왕에 오르고 난 뒤 우승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골프는 멘털게임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마음가짐이 흐트러졌다는 분석이다.

◇ 서른이 되면

내년이 되면 정일미는 만 서른살이다.

과년한 나이에 결혼은 생각도 안하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매일 운동하는 여자랑 결혼할 남자가 있을까요.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당분간은 골프에 전념할 계획이에요. 더구나 내년에는 올해 못한 우승도 해야 하고요."

그는 지금은 결혼보다 골프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우선 약점으로 드러난 퍼팅을 고치기 위해 겨울훈련 기간 퍼팅 그립을 바꿔볼 생각이라고 했다. "집게발 그립(왼손은 정상적으로 잡고 그립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미는 형태)이라도 해볼 생각이에요. 그립을 바꾸는데 성공하려면 말 그대로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정일미는 "언젠가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무대에도 뛰어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결과를 기대하기보다는 프로선수로서 미국 무대를 꼭 체험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 우승을 몇차례나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두고보세요. 셀 수 없이 많이 할 거예요."

2인자의 미소가 싱그러웠다.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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