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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산책] 부시 '선생님'의 훈시… 불쾌한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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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주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을 들은 유럽의 지도자들은 씁쓸한 감정을 애써 눌러야 했다.

부시 대통령이 뉴욕까지 날아가 연설을 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 전쟁을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유엔과 세계 각국에 감사의 뜻을 전달하고자 함이었다. 적어도 유럽은 그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유엔본부의 각국 대표들은 조회시간의 학생들처럼 부시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를 들어야 했다. '테러에 맞서 세계가 해야 할 일'이 주제였다.

부시 선생님은 "많은 정부가 자신들의 의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데 감사하지만 더 많은 것이 필요하고 요구된다"며 테러 전쟁에 더욱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칠판에 이름을 적지는 않았지만 "일부 국가는 테러가 비켜가기를 기대하며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힐책했다. 군사작전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위베르 베드린 프랑스 외무장관이 '모병 연설'이라고 평가한 부시의 훈시에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번 테러가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노선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가 깨졌기 때문이다.

유럽은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위한 교토의정서나 국제형사재판소(ICC) 창설 등 다자(多者)외교가 필수적인 많은 문제에 미국이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데 우려하고 있다.

테러와 관련해서도 "모든 문명사회에 대한 도전인 테러와의 전쟁에 국제사회가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전쟁을 자기 뜻대로만 수행하려는 미국의 태도가 불만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조약 제5조 상호방위 조항의 발동 의지를 천명했지만 미국은 나토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테러자금 차단을 위한 유엔 결의안도 못미더워하는 눈치다. 대신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모두 적"이라는 부시 독트린을 강요하고 있다. 유럽 정상들은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고 있지만 유럽 언론들은 그렇지 않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미국의 외교는 자신이 보안관 역할을 맡고 나머지 국가는 조수역을 담당하는 '민병대 외교(posse diplomacy)'라고 꼬집었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연설 중 유일하게 훈계가 아니었던 것은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에 대해 짧게 언급한 부분뿐이었다"고 비야냥댔다.

나토의 한 외교관이 유럽의 불만을 잘 요약하고 있다. "미국은 '모두 함께 한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은 미국이 결정한다. 우리는 들러리일 뿐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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