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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보희 "조연이 더 좋아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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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198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했던 여배우 트로이카는 이보희 ·이미숙 ·원미경이었다.

이 중 이보희는 농염함과 순수함이 혼합된 독특한 색깔을 무기로 은막을 장악했다.‘무릎과 무릎 사이’‘어우동’에서 당시로선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았는가 하면,‘접시꽃 당신’‘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는 순수한 여성상을 구현해 냈다.

이현세씨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공포의 외인구단’의 애절한 주인공 ‘엄지’도 그의 분신이었다.

이제 불혹을 넘긴 이보희(42).스크린을 떠난 그가 요즘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예쁜 배우는 생명력이 짧다”는 연예계의 속설을 비웃듯 중년에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시청률 1위를 질주 중인 SBS '여인천하'에서 그녀는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로 출연 중이다.

자애로우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노년의 면모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용의 눈물'을 비롯해 네번째 사극 출연이지만, 어느 때보다도 성숙한 연기로 극을 안정적으로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채널을 돌려 KBS로 가면 1백80도 변신한 그녀의 모습이 준비돼 있다. KBS-2TV의 새 드라마 '여자는 왜'에서 푼수기 넘치는 에어로빅 센터 사장 역을 맡은 것이다.

한의원 원장(김무생)과 알콩달콩 중년 이후의 사랑을 엮어나가는 역이다. 방영 전 연출진이 '여인천하'에서의 엄숙한 분위기를 의식해 "좀 망가져 달라"고 부탁했다는데, 정말로 코믹의 진수를 선보이며 극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렇게 사극과 현대극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모두 조연이어서 젊은 시절 주연 자리를 독차지했던 그로선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즐거운 표정이다.

"조연을 하다 보니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어 좋아요. 연기자의 기본은 변신 아닐까요. 연기의 새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이 즐거워요."

그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하나 있다. 바로 '에로 배우'라는 타이틀. 이보희 하면 '어우동'을 연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을 단 한번도 에로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훨씬 많은 영화에서 순수한 여성상을 연기했고, 자신의 실제 성격은 '여인천하'의 자순대비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보희는 어떤 배우다, 이런 식으로 규정되고 싶지 않아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맡은 배역을 척척 소화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는 90년대 중반 영화를 떠나 TV에서만 얼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꿈은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워낙 젊은 배우들이 판을 치는 상황이라 중년의 그가 설 자리가 없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화려한 복귀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바라보는 방향엔 '신데렐라'는 없었다.

그의 꿈은 시골 촌부의 주름진 얼굴과 순박한 마음씨를 보여줄 수 있는 역을 맡는 것이다. 천연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연기 말이다.

빅토르 위고는 그의 명작 '레미제라블'에서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갖추어지면 존경받을 수 있다. 행복한 노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명이 비친다"고 했다.

내년이면 연기 경력 20년. 주연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역에 충실해 젊은 시절 전성기보다 더욱 풍성한 연기를 보여주는 그에게서 연륜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이제 진짜 그의 비상(飛翔)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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