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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개도국 달래는 WTO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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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사막 위에서의 불안한 만남'으로 현지 언론이 표현한 것처럼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는 9일 추가 테러 걱정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시작됐다.

공항에 도착해 X-레이 투시기를 세차례나 거친 뒤 거리로 나설 수 있었다. 호텔 주변 반경 1.5㎞는 장갑차가 동원돼 회의장 출입을 완전 통제한 상태다. 취재진에게도 방독면과 탄저병 치료제가 개별 지급됐다. 만약 회의장이 습격을 받으면 숙소로 즉시 돌아가라는 비상대처 요령이 가장 먼저 제시됐다.

인구 60만명의 작은 나라에서 처음 열린 대규모 국제회의라서 그런지 사우디아라비아 운전사, 파키스탄 행사진행요원에 군인들은 예멘에서 왔다고 한다.

행사 진행도 매끄럽지 않았다. 미국 테러사태 이후 장소를 바꾸자는 주장을 접고 강행한 카타르 도하 회의는 엄격한 출입국 심사로 비정부기구(NGO)의 접근이 어려워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회의장 안에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 뜨거운 논쟁이 이어졌다.

'자유무역'보다 '공정한 무역'을 내걸며 세계화가 가져온 빈부격차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는 개도국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이들은 우루과이라운드가 개도국에게 서비스시장의 개방과 지적재산권의 보호 등 의무만 부과한 채 수출확대의 이득이 선진국에 돌아가는 모순을 낳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라운드의 이름도 개도국 개발에 초점을 둔 '신개발 의제(New Development Agenda)'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그동안 국제통상 무대를 주물러온 미국도 주춤한 상황이다.

노동정책을 교역과 연계해야 한다는 '노동 라운드'를 주창했다가 개도국의 반발에 부닥쳐 시애틀 회의를 무산시킨 경험이 있는 미국은 강경한 개도국을 달래느라 테러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성난 목소리'를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농업 분야에서 개도국의 지위를 인정받은 한국은 자칫 개도국 지위 졸업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때문인지 이번 협상에서 중간에 끼어 어정쩡한 모습이다.

뜨겁게 달라오른 회의장을 지켜보며 세계 12위의 교역국이면서도 1백42개 WTO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무역협정을 맺지 못한 한국 통상정책의 현실이 새삼 안타깝게 다가왔다.

홍병기 경제부 기자 카타르 도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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