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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중립적 대통령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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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순수한 의도와 충정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그런 일이 많은데,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정치관계에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좋은 의도로 행동해야 하고 동시에 바람직한 결과를 얻도록 신경 써야 하는 정치인이 직면하게 되는 딜레마이다.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이 딜레마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 행정부로 갈 국정 주도권

한편으로 생각할 때 그의 결정이 상당부분 순수한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물론 정부와 여당에 대한 국민 지지도의 하락, 민주당의 시끄러운 내부사정, 대통령 지도력의 약화 등 어려운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인 계산도 이면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으로 국정에 전념하고 민주당이 스스로 쇄신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는 공식적 입장을 그냥 불신할 수는 없다.

순수한 의도가 결여됐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대통령의 결정을 냉소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사실, 대통령의 초당파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인 민주당 총재직 사퇴는 야당 측과 중립적인 학자.언론인.시민단체 대표들이 요구했던 사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대통령의 충정어린 결단이 예상치 않게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두가지 점에서 우려가 든다.

첫째, 초당파적 대통령이 국정수행에 전념할 때 국민의 또 다른 대표자인 여야 국회의원들은 자칫 국정수행에서 더욱 더 주변적 역할만을 맡을 위험성이 잠재해 있다. 대통령은 자신의 초당파적 위상과 국회의원들의 당파적 행태간의 차이를 고려해 국회와의 정책협의 경로를 넓히려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국정수행의 주도권이 행정부 쪽으로 더욱 끌어당겨질 것이다. 그동안은 형식적이나마 당정협의회가 정책 형성의 장으로 존재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정책사안이 행정부의 독점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행정부와 대통령 소속당간의 공식적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국정수행상 행정부 중심주의가 보다 강화된다면 한국 민주주의에는 애석한 일이다.

국정수행은 대통령이 맡고 국회의원들은 권력게임이나 한다는 인상을 국민이 갖게 되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이 배가될 것이다.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최악의 경우 초당파적 대통령이 한국사회를 위해 특정 정책을 국회에서 꼭 통과시켜야 한다는 신념에 집착한 나머지 국회의 압박수단으로 대(對)국민 선동전략을 활용한다면 대의민주주의의 제도기반이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총재직을 사퇴한 金대통령의 순수한 의도가 가져올 수 있는 둘째 부작용은 민주당의 제도화가 오히려 방해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당은 일반국민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밑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요구와 이익을 제도의 틀 속에서 수용.조정하는 과정을 거치며 제도화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부재하게 된 현 상황에서 민주당은 주로 대권욕에 따라 행동하는 소수의 정치인들이 각자의 영향력 극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급격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모습을 바꿔나갈 전망이다.

*** 黨 제도화 방해 받을 수도

그것은 권력을 위한 위에서의 변화이지, 진정한 밑으로부터의 변화나 정책신념에 따른 변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채 소수 대권주자들의 계산에 따라 당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당의 자생력을 증가시켜주는 쇄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당의 규칙.규범.정체성이 깨지며 제도화로부터 더욱 멀어질 수 있다.

중립적 대통령 아래서 초래될 수 있는 부작용들에 대한 논의가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순수한 의도가 뜻하지 않게 부정적 결과를 낳는 딜레마가 현실화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이 바람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초당파성을 유지하면서도 국회를 국정수행의 동등한 파트너로 간주해야 하고, 대권지향의 소수 정치인들이 민주당의 제도화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당의 하부조직 및 일반국민으로부터의 견제가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의 실현이 모두 어렵다는 데 있다.

林成浩 (경희대 교수 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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