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닫혔던 궁궐 건물들이 하나 둘씩 일반에 공개된다. 관객과 함께하는 문화재 활용 차원에서다. 국보 224호인 경복궁 경회루 정경. 국내 누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2005년부터 2년간 개방됐다가 다시 닫혔다. 올해 다시 일반에 문을 열 예정이다. [문화재청 제공]
◆사람의 손때가 한옥을 살린다=6월 개방 예정인 경복궁 경회루에 미리 들어가봤다. 마룻바닥에는 기하학적인 무늬의 좀이 슬어 있었다. 미군정 당시 서양식으로 사계절 내내 카펫을 깔아둔 탓에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은 흔적이다. 문을 꼭 닫아둔 창덕궁 서향각의 마룻바닥은 퍼석퍼석하게 일어나 맨발로는 밟을 수 없는 상태였다. 반면 창덕궁 영화당의 마루는 윤이 나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한 덕분이다. 온돌 체험용으로 불을 지핀 창덕궁 선향재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겼다. 문화재청 활용정책과 이길배 서기관은 “한옥은 비워두면 금방 망가진다”며 “목조 건축에 사람의 손때가 묻으면 ‘누마루 길들이기’ 효과로 더 잘 보존된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수정전, 창덕궁 영화당, 창경궁 통명전, 덕수궁 정관헌, 종묘 망묘루 등 궁궐 별로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전각을 하나씩 개방했다. 그러나 화마가 숭례문을 한 순간에 삼켜버리지 않았던가. 사실 지난해 궁궐은 공사판이었다. 소방 방재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토요일에만 개방하는 덕수궁 중화전의 경우 전각 안팎에 한 명씩, 방호원 두 명을 배치해 내부 관람 인원을 20명 선으로 통제한다.
◆왕처럼, 왕비처럼 걸어보기=올 들어 세 차례 시범 운영된 ‘창덕궁 달빛 기행’의 반응은 뜨거웠다. 야간에 처음으로 문을 연 창덕궁을 보러 첫 회에 300명이 몰렸다. 당초 100명만 모집하려다 참가신청이 쇄도해 인원을 늘렸다. 3차 행사가 열린 지난달 28일에는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도 30명이 참가해 밤의 창덕궁을 즐겼다. 창덕궁 선향재는 기업체와 정부 부처의 회의 공간으로 몇 차례 시범 대여했다. 원래 서재로 쓰던 공간이라 회의장소에 들어맞는다는 판단에서다.
경복궁에선 궁중조회인 ‘상참의’와 왕가의 산책을 재현하고, 창경궁에선 왕비 간택 의례를 재현한다. 창덕궁 내의원에선 조만간 한방 체험 행사를 열 예정이다. 각 궁궐 전각의 원래 쓰임새와 들어맞는 활용안부터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다. 창덕궁 관리소 안정열 소장은 “달빛 기행을 성공리에 마친 뒤 한국관광공사에서 ‘한국 관광의 밤’ 행사를 인정전에서 열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정전으로 사용되던 인정전의 격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중국의 자금성은 자칭 ‘고궁 박물관’이라 일컬을 정도로 전시 공간으로 활발히 활용한다. 목조건물이긴 하나 건물 하나하나가 크고, 돌로 된 바닥이라 전시장 용도로 적합해서다. 천황 일가가 거주하고 있어서 제한적으로 관람을 허용하는 일본을 빼고는 세계적으로 궁궐이 컨퍼런스·전시회 등의 장소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김 교수는 “마당을 활용하고, 새로 복원돼 문화재 훼손에 대한 부담이 적은 공간부터 활용하면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각 개방에 따라 필요 인력과 예산이 느는 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현재 경복궁의 정규직·비정규직 직원은 안내해설사·공익요원·청원경찰·관람지도위원 등을 포함해 93명, 창덕궁은 94명이다.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의 1년 예산은 47억 원이다. 한지 바르는 데만 2억 원이 소요될 만큼 궁궐 살림살이엔 돈 들어갈 곳이 많다. 전통 창호 안쪽에 유리창이 설치된 전각엔 아예 한지를 바르지 않는 식으로 예산을 아끼는 실정이다.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는 궁궐의 활용과 관리를 법인체에 맡기는 방안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수시로 자리가 바뀌는 공무원이 관리하기 보다는 법인이 주인의식을 갖고 장기적인 활용 계획을 세우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며 “정부는 정책을 만들고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지나친 상업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감독하라”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