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쌀값 문제 해법은 '직접 지불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초여름의 극심한 가뭄을 극복한 올해는 사상 최대의 풍년이다. 예전에 이처럼 풍요로운 결실을 보았다면 격양가를 부르며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농촌은 어둡고 우울하다. 쌀값이 큰 폭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쌀값이 올해처럼 대폭 하락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올 한해만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웃 일본.대만, 심지어는 중국에서조차도 상당 기간 진행돼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게 대세다.

그렇다고 정부가 앞장서 해결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세계무역기구(WTO)규정 때문이다. 쌀값에 관한 한 정부의 손발은 꽁꽁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농민단체들은 쌀값 하락으로 인한 손실을 보상받기 위해 일선 농협에 시가보다 훨씬 높은 기준(정부 수매가 2등급)으로 쌀을 사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많은 일선 농협이 농민단체들의 요구에 못이겨 울며 겨자먹기로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할 경우 농협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방정부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내년 선거를 앞두고 농민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일부 시장.군수들이 농협 손실의 일부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WTO 규정에 어긋나고 실정법상으로 제약이 많아 시장.군수들은 고민할 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일선 시.군이 시가보다 높은 값으로 사는 것을 중앙정부가 방관할 경우 다음번 쌀 협상에 걸림돌이 될 게 뻔하다. 정보화 시대에 이해 당사국들이 이를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매우 난처한 입장이다.

일부 농민은 WTO 규정이 중앙정부만 구속할 뿐 지방정부를 구속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에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이들은 "WTO 규정을 좀 위반하면 어떠냐, 농민을 살리고 봐야 할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난마처럼 얽힌 쌀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부는 올해부터 WTO 규정에서 허용하는 직접지불제를 쌀에 적용하려고 한다.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당 농업진흥지역의 경우 25만원, 비진흥지역에는 20만원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제 도입 초기단계여서 정부의 고충을 상당 부분 이해한다.

하지만 농민들의 주장처럼 그 액수가 적은 게 사실이다. 더 늘려야 한다.

농협은 정부 수매분을 제외하고는 시가로 수매하되, 쌀값 하락으로 인한 농민의 손실을 보상해줘야 한다. 또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계획한 직접지불액의 절반 정도를 추가 지원해 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WTO 규정에도 위배되지 않고, 일선 농협도 살 수 있다. 농가 소득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상당량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실적이고 모든 농민들에게 혜택을 고루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분배의 형평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농민들은 가격보장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가격보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득을 보장하는 데 있다. 직접지불제로 WTO 규정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농민에게 어느 정도 소득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가격보장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유종근 <전라북도 지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