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5일 화장 유언 서약 김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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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은퇴 프로레슬러의 아름다운 노년-.

어둡고 힘들었던 1960, 70년대 박치기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전 프로레슬러 김일(金一.72)씨.

그가 링을 떠난 70대 노구에 또 한차례 박수 갈채를 받게 됐다. '화장(火葬)유언 서약식'을 했기 때문이다.

金씨는 5일 오후 4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설문동 사설 납골공원인 ㈜자유로 청아공원에서 레슬링 후배와 제자, 친지.지역주민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약식을 했다.

레슬링 후유증에 고혈압.노환 등이 겹쳐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 입원,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는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행사장에 들어섰다.

병환 때문에 발음이 썩 좋지 않은 金씨가 신념에 찬 표정으로 서약서를 읽고 취지를 말하자 주위가 숙연해졌다.

"젊었을 적에는 몸으로 조국의 스포츠발전에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은퇴 선수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화장 문화의 확산에 앞장서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金씨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묘지가 늘면서 좁은 국토가 잠식되는 게 늘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후손들에게 길이 물려줄 국토를 아름답게 보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장묘 문화의 개선에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화장 유언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자유로 청아공원 김영복(金永福.41.여)대표는 "평생을 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프로레슬러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청아공원은 사후 金씨의 유골을 영원히 무료 안치해주기로 했다.

후계자인 이왕표(李王杓.46.WWA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씨는 "선생님 같은 사회 저명인사의 화장 유언은 화장.납골 문화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반겼다.

金씨는 지난해 3월 데뷔 41년 만에 국내에서 은퇴식을 가졌으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그는 1959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역도산의 문하생으로 입문한 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박치기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일본에서 외롭게 투병하다 94년 귀국했다.

고양=전익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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