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외교부장관은 '부재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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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중국에 의한 한국인 처형사건으로 나라가 망신살이 뻗쳐 있는데 대외관계의 총괄책인 우리 외교장관이 장기 부재 중이다. 중대 국익을 위해 외국과의 교섭차 그렇다면 문제가 안된다.

한승수(韓昇洙)외교통상부장관은 뉴욕에서 유엔총회 의장직을 수행하느라고 나라를 오래 비우고 있다. 듣기에는 그가 서울에서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겉보기로는 국회의원이기도 한 그가 국회의장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 데 문제가 있다.

***유엔총회 의장은 儀典責

유엔총회 의장직은 기본적으로 의전책(儀典責)이다. 지난 30년 동안 윤번제 의장직을 회원국 외교장관이 맡은 경우는 여럿 있다. 나미비아.우루과이.우크라이나.코트디부아르.불가리아.몰타.나이지리아.아르헨티나.방글라데시.콜롬비아.알제리 등 개도국들이다.

거의 전부가 중요한 당면 외교현안이 없거나 외교장관이 오래 본국을 비워도 될 만큼 작거나 태평스러운 나라들이다.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우리 주변의 소위 4강이 유엔총회 의장직을 맡은 경우는 물론 없고 56년의 유엔 역사상 선진국 외교장관이 총회의장직을 수행한 경우는 벨기에.캐나다.이탈리아 3개국뿐인데 그것도 유엔 초기였다. 분쟁.긴장지역 국가들의 외교장관이 실속 없이 분주한 그 자리를 맡을 엄두도 못내는 것은 상식이다.

말하자면 대외관계의 알맹이 의제가 있는 나라들의 외교장관은 유엔총회 의장직 같은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 자리는 회원국의 주유엔대사가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고,예외적으로 한가한 정치인 등이 맡기도 한다.

韓장관은 며칠 전 일시 귀국했다가 현재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11월 4~6일 브루나이'아세안+한.중.일'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다.

그는 金대통령이 지난 10월 상하이(上海)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 참석할 때도 일시 귀국했다가 그렇게 수행했다. 그는 오는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되는 올해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유엔을 대표해 기념 메달과 증서를 받게 되리라고 한다.

유엔총회 의장으로서 그가 수행(遂行)하고 있는 일이나 외교장관으로서 한국 대통령을 수행(隨行)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외교의전에 속한다.

韓장관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개인적으로 그에게 모두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장관이 몸으로 때우는 의식집전(儀式執典)의 '바쁜 한직(閒職)'에서 소일해야 할 것인지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정세와 한국의 외교과제로 보면 한마디로 한국 외교장관이 유엔총회 의장직 같은 것을 맡을 형편이 못된다.민감하고 힘에 겨운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의 주전장(主戰場)이었던 한반도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 등으로 탈냉전시대 국제정치의 주요 어젠다로 남았다가 '테러전쟁시대'에도 안심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지대로 인식되고 있다.

악당국가(rogue states)명단에 계속 올라 있는 북한이 테러범들과의 연고로 의심을 사고 있는 이상 북.미관계는 더 얼어붙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햇볕'정책으로 빚어진 한.미관계의 불협화음을 해소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고이즈미(小泉)일본총리의 떨떠름한 방한은 한.일관계의 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다.

러시아에는 아무리 추파를 던져봐도 득될 것이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런 판에 한국인 처형사건을 둘러싸고 중국은 한국에 대해 잘못이 없으니 중국에 대한 비난을 중지하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외교현안 언제 처리하나

중국으로부터 꼭 망신을 당해서가 아니라 한국 정부의 대외관계 처리를 위한 조직관리를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중국측에서 보낸 사건통보 문서의 접수문제 등을 둘러싼 실무책임만을 따지고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번 같은 국가적 모욕은 국가조직의 장악 리더십 부실과 그 운용상의 허점에 기인한 것이 분명하다.

대외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않고도 뉴욕에 앉아서 전보와 전화로 이른바 4강을 잘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나마 뉴욕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강변한다면 뉴욕타임스에 거의 언급되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미국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박세리보다 나으냐고 묻고 싶다. 유사한 일들의 재발방지 조치를 취하고 외교전략 수립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외교장관이 외무본부를 오래 비워서는 안된다.

李長春(명지대 초빙교수 ·전 외무부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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