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오디션' 연재 끝낸 천계영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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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만화 『오디션』과 작가 천계영. 1990년대의 한국 만화를 이야기할 때 전문가적 관점에서나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나 단연 선두에 놓음직한 이름이다.

천계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만화출판계의 불황의 행진 속에서도 권당 10만부를 파는 몇 안되는 '스타' 중 하나이며, 『오디션』은 '아기공룡 둘리'처럼 팬시상품.애니메이션.휴대폰 캐릭터 등 다른 분야로까지 확대돼 '만화도 돈을 번다'는 것을 과시한 문화상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97년부터 만화잡지 『윙크』에 연재해온 『오디션』이 이달 초 끝을 맺었다. 『오디션』은 발군의 음악적 소질을 가진 네 명의 소년으로 구성된 '재활용 밴드'가 오디션에서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만화다.

천계영은 이 작품에서 10대들의 우상인 대중문화 스타를 특유의 유머와 패션 감각이 가득한 그림 솜씨로 빼어나게 묘사했다.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는 줄거리의 흡인력 덕분에 '남자들도 좋아하는 순정만화'라는 애칭도 선사받았을 정도다.

유학을 결심하고 열흘 후 미국으로 떠나는 천계영을 지난 주 만났다. 『오디션』10권과 같이 나올 일러스트집 마감을 아직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작가의 수명을 갉아먹는다는 '지옥의 연재 생활'을 청산한 덕인지 표정은 무척 밝았다.

아참, 이 얘기를 꼭 해야겠다. 그간 천계영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만나는 것이 전연 불가능했다. 실제로 만나본 그는 '만화가는 까다롭고 폐쇄적이다'는 예상과 달리 밝았고 소탈했고 또 섬세했다.

-연재 끝내니 홀가분하죠?

"제가 좀 완벽주의 기질이 있어요. 그래서 연재할 때는 늘 괴로웠어요. 단행본으로 나와도 잘 안 봤어요. 시원섭섭해요."

-연재가 좀 길었나요. 어때요.

"'다시는 장편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연재를 하다 보면 때론 맘에 들지 않아도 원고를 넘겨야 하고 그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려야 하니 작품 질이 떨어질 때도 많거든요. 결말까지 콘티를 짜놓는 식으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유학 간다면서요.

"일단 덴버에 있는 친구집에 머물다 뉴욕으로 갈 생각이에요. 뭘 공부할 지 자꾸 생각이 바뀌어서 학교 수속은 미뤘어요. 어학 연수부터 할 계획이에요. 저, 세계 무대로 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한국 만화계가 좁아서 답답했나 봐요.

"제 만화를 볼 수 있는 독자의 수가 너무 적다는 안타까움은 있었어요. 제 친구 중에 중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 살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오디션』을 보여주니까 "이런 만화는 처음 봤다"고 감탄하는 거예요. '아, 내 만화의 감성이 한국에서만 통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일러스트든 출판만화든 해외 무대에서도 제 그림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리라 봐요."

천계영은 "원래 모험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긴 그의 만화가 데뷔도 모험이라면 모험이었다. 이화여대 법대를 졸업한 후 소규모였지만 나름대로 인정받으며 다니던 광고회사를 어느날 때려치우고 신인 공모전에 응모했던 것이다.

-만화가가 될 무렵 영향을 받은 만화가가 있나요.

"음… 일단 한번 본 만화에서 다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돼요. 유시진.나예리.박희정씨를 좋아해요. 박희정씨는 한국 만화라고 믿기 힘들 만큼 진보적인 스타일이죠."

-만화를 잘 보지 않는 사람도 천계영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죠. 만화가 '상업적 성공'을 거둔 전례가 둘리 말고는 없어서 그런가.

"저는 캐릭터 상품 때문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은 편이에요. 제 작품의 부산물이 제 작품보다 커지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또 상품화 과정에서 인간적인 갈등때문에 마음 고생도 심했구요. 아직 국내 관련시장의 기반이 열악한 탓이 크겠지만 상품으로 나온 걸 보면 막상 내 자식같은 애정이 생기지 않았어요."

-다음 작품은 어떤 내용인가요.

"장르는 SF고 제목은 '사마리안'이에요(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신에게 구원받는 인간의 얘기인데 대충 구상이 끝났어요. 그런데 스필버그 감독의 'A.I.'를 보니 비슷한 구석이 있더군요. 수정해야 해요."

기선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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