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중국 경제 대장정] 중국관 새마을 농촌 화시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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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현관문을 열자 탁 트인 거실이 펼쳐진다. 천장은 어른 키 세배쯤 될 만큼 높다. 특급호텔의 로비를 뺨치는 실내장식. 바닥엔 붉은 색 대리석이 깔려 있다. 안방에 놓인 50인치짜리 프로젝션 TV와 첨단 음향기기로 꾸민 '홈 시어터(Home Theater)'는 영화시사회장을 떠올리게 한다.2층에선 아이들의 경쾌한 피아노 연주소리가 들려온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부자집 풍경이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상하이에서 1백20㎞쯤 떨어진 장쑤(江蘇)성 장인(江陰)시에서도 외곽으로 한 길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마을 농가의 모습이다.

중국 농민이라면 지난 20여년 간 귀가 따갑게 들었을 '화시춘(華西村)'이 바로 이곳이다. 겉만 보면 거푸집에 넣고 찍어낸 듯 똑같은 3층짜리 건물 수백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평범한 마을이다.

하지만 속은 이처럼 완전히 딴 세상이다. 우기(雨期)가 긴 장쑤성의 날씨를 고려해 마을 안의 모든 집과 시설을 중국식 회랑으로 연결했다.비가 와도 우산 없이 학교.쇼핑몰.스포츠센터 등을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마을 경비원은 "화시춘의 회랑은 총길이가 1만m로 서태후가 살았던 베이징 이화원(梨花園)의 회랑보다 길다"고 자랑했다.

여느 중국 농가처럼 가난하고 지저분했던 화시춘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우런바오(吳仁寶)란 '간 큰' 촌장이 부임하고 나서다.

문화대혁명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지만 吳촌장은 겁도 없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마을 농사는 5%의 주민이 도맡도록 했다. 나머지 95%의 주민은 방직이나 기계조립 공장 등을 만들어 운영토록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중국에 개혁.개방 바람이 시작된 80년, 화시춘은 공업생산액 1억위안(약 1백60억원)을 달성해 장쑤성 최초의 '억대촌'이 됐다.

화시춘의 성공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농촌에도 불어 넣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중국정부에 '모범답안'으로 평가됐다.

즉각 지방정부는 물론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졌다. 화시춘의 공장들은 시골마을기업인 중국 향진(鄕鎭)기업의 모델이 됐으며,화시춘의 무용담은 전역으로 퍼져 중국식 '새마을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장쑤성의 또 다른 향진기업인 싼마오(三毛)그룹의 항윈(黃贇)부장은 이를 "일단 하나의 성공사례가 생기면 관(官)에서 끌고 민(民)에서 밀어 중국 전역으로 확산하는 중국식 개발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마을 탄생 40돌을 맞는 화시춘은 '생일잔치'에 여느 해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화시춘 2대촌장 우셰둥(吳協東)은 "올해는 화시춘이 다시 한번 변신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상투적인 '계속 발전'이 아니라 굳이 '변신'이라는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20년간 연평균 21%나 됐던 향진기업의 성장세가 최근 주춤해지면서 화시춘의 미래에도 우려의 눈길이 드리워진 때문이다.

개혁.개방 초기엔 단순 조립.가공을 주로 한 향진기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젠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吳총경리가 말한 '변신'에는 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동시에 깔려 있다.

화시춘은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이런 환경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해 왔다. 94년 마을기업들을 '화시춘집단공사'란 그룹으로 계열화한 것이나, 99년 화시춘주식유한회사를 선전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킨 것도 향진기업이란 좁은 틀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지난 6월엔 화밍(華明).첸진(前進).징방(涇浜).싼위샹(三余巷) 등 4개 마을을 합병해 면적을 8배로 늘렸다. 농지와 공장 부지를 확보하는 게 1차 목적이다. 여기에 더 원대한 계획도 있다. 넓어진 땅에 대규모 정원을 만들어 화시춘을 공업단지와 생태공원이 어우러진 관광단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이다.

吳촌장은 "화시춘을 멀리서 보면 나무숲(林園)같고, 가까이서 보면 공원(公園)이며,전체적으론 낙원(樂園)이 되는 삼원(三園)으로 만들 것"이라며 "5년 안에 가능하다"고 장담했다.

향진기업으로 '강남제일촌'이 된 화시춘. 이 마을이 다시 중국 농민의 '낙원'으로 거듭날지 중국의 온 농촌이 지켜보고 있다.

◇ 향진기업이란=농촌 행정단위인 향(鄕).진(鎭)서 일어난 기업을 가리킨다.장쑤성 남부 '쑤난(蘇南)'지역과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주변, 광둥(廣東)성 주장(珠江)삼각주지역이 대표적인 향진기업촌이다.쑤난지역은 주민 공동 소유제인 '집체기업'이 90% 이상이고 원저우지역은 개인이나 사영기업이 80% 이상이다. 주장 삼각주엔 홍콩.마카오 등과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화교자본과 합작한 수출기업이 많다.

<특별취재팀>

이정재(경제연구소)기자

남윤호(도쿄 특파원)기자

양선희(산업부)기자

정경민(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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