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제헌국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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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소망을 모아 출범한 대한민국이지만 불과 2년도 못 되어 중·소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란 국가존망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60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고비를 넘어왔는가. 근자의 우리는 천안함 침몰이 가져온 국민적 위기의식과 불안감 속에서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본 골조는 과연 얼마나 튼튼한가를 새로이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국가의 위기국면에서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 목표를 추구하며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국가의 건전성을 재점검하는 것은 국가존립과 발전의 필수조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안보 위협이나 경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당장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국방과 경제의 위기라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정체성과 능력에 대한 시험이라 하겠다. 안보체제나 경제체제에 대한 점검도 꼭 필요하지만 한국의 민주정치에 대한 건강진단 없이는 국가의 추진동력을 보장하기 어렵다. 혹시라도 우리의 민주정치가 고질적이고 치명적인 지병의 상태가 아닌지 더 늦기 전에 정밀검사가 필요한 시점이다.

작금의 우리 공동체의 건강상태를 살펴보면 곳곳에서 통합·화해·타협보다는 분열·갈등·파편화가 심화되는 징조를 보게 된다. 5000만 국민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민주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국민 정서가 통합과 분열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민심의 추세는 냉철히 관찰돼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을 떠나보내는 국민의 마음, 밴쿠버의 김연아 선수와 안나푸르나의 오은선 대장을 떠받친 국민의 성원은 분명히 통합의 동력을 보여주었다. 반면 적절한 조절이나 타협을 못한 이념이나 지역, 계층 간의 갈등이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집단적 분열로 치닫는 병리현상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절대로 방치돼서는 안 될 위험한 증후다.

공동체의 통합과 분열의 기로에서 누구보다도 선택의 열쇠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은 정치권이다. 국민들 사이에서 분열의 증세가 나타나더라도 정치권이 통합의 의지와 행동을 확실히 보여주면 대세는 위기극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분열과 갈등을 앞장서서 선동한다면 그 사회와 국가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국민이 갖는 정치인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 민주정치를 효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세계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근대민주정치의 원조를 자처하는 영국에서도 양당정치로 운영되던 의회중심체제가 3당 체제로 변형되는 혼란을 겪고 있다. 전 국민이 추앙하는 국왕이 정치안정을 담보하는 듯싶었던 태국의 민주정치 실험이 붉은색과 노란색 셔츠로 편을 가른 대중의 가두대결로 파탄의 절벽 앞에서 신음하고 있다. 결국 민주정치는 대표성과 책임성이 보장되는 대의정치가 건전하게 운영될 때만 원활하게 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결론을 재삼 강조할 수밖에 없다. 대의정치, 즉 의회가 정치의 중심에 서는 정치가 부진하면 강력한 지도자나 해결사를 기다리게 되는 대중의 ‘독재에 대한 향수’가 어떤 형태로든 작동하는 사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국회는 지체 없이 제헌국회의 정신을 계승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헌법을 크게 개정하지 않더라도 헌법적 차원에서, 즉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의 골격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국민의 지혜를 모으고 정치권의 타협 능력을 발휘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게 된다. 새롭게 선출된 여야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제2의 건국이란 자세로 역사적 과업에 임하기를 바란다.

이홍구 칼럼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