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문자로 “이혼하자” 통보…간접화법의 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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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아무래도 이 여인, ‘일본 스포츠 신문 1면 장식’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영화 ‘박치기’, 드라마 ‘1리터의 눈물’ 등에 출연했던 일본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25·사진) 이야기다. 2년 전 스물두 살 연상의 비디오 아티스트 다카시로 쓰요시라는 분과 전격 결혼을 발표해 화제가 됐던 그녀가 이번엔 전격 이혼으로 일본 스포츠 신문 1면을 도배했다. 여배우가 이혼한다는 뉴스가 뭐 그렇게 특별한가 싶지만 최근 몇 년간 그녀가 걸어온 독특한 행보를 보면, 일본 언론과 대중의 지나친 호들갑을 이해할 만도 하다.

일본에서 사와지리 에리카 하면 누구나 ‘베쓰니 사건’을 떠올린다. 2007년 영화 ‘클로우즈 제로’ 시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점심을 잘못 먹었는지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영화 촬영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냐”는 사회자의 뻔하디 뻔한 질문에 “베쓰니(別にㆍ별로)”라는 짧은 대답으로 시사회장을 얼렸다. 화를 억누른 사회자가 이번엔 “그러면 특별히 마음에 남아있는 장면은?”이라고 물었다. 역시 지나치게 짧은 대답. “도쿠니(特にㆍ특별히 없다는 뜻).” 이 사건으로 그녀는 순식간에 ‘비호감 연예인 1위’로 올라섰고, 예정돼 있던 영화와 광고 등에서 줄줄이 퇴출당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의 악명은 꾸준히 이어진다. 결혼 당시에는 ‘부부관계 월 5회, 외도시는 벌금 1000만엔’ 등의 내용이 담긴 결혼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됐고, 지난해 컴백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는 ‘허가 없이는 기사를 내지 않겠다’ ‘오해를 부를 만한 표현은 쓰지 않겠다’ 등의 서약서를 취재진에게 요구해 언론의 집중 비난을 받았다.

이혼 과정 역시 그녀다웠다. 남편 다카시로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 상의 없이 먼저 공식 홈페이지에 이혼 사실을 공개한 그녀는 며칠 후에야 남편에게 “이혼하고 싶다”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 이혼을 통보했다 한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가 당했던 ‘포스트잇 이별통보’에 버금갈 만한 간단명료한 방법이다. 아사히 TV에서는 그녀의 이혼 소식와 함께 ‘메일 한 통으로 작별하는 이상한 부부관계’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보냈는데, 인터뷰에 응한 한 일반인 여성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문자로 말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냐”며 그녀를 옹호했다.

일본 인터넷 뉴스 사이트인 제이캐스트(J-CAST)는 “30대 이하의 이혼 부부들 중 3% 정도가 휴대전화 문자나 메일로 이혼을 통보한다”며 “이런 새로운 이혼통보 스타일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진지하게 전망하기도 했다. 섣불리 대화를 하면 오해를 일으키거나 협상에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메일 등으로 명확히 이혼의사를 전달한 후 나머지는 변호사에게 맡기는 것이 오히려 추천할 만한 방법이라는 친절한 조언도 곁들여진다.

그러고 보면 일본인들, 얼굴 마주 보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데 유난히 약하다. 어떤 사안이든 상대방 앞에서 좋다 싫다 확실히 의사를 밝히기보다는,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라는 식으로 말끝을 흐리며 애매하게 답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신의 말이 혹시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거나 상처가 될까 봐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라나. 말 대신 휴대전화 문자로 전한다고 상처가 덜할까. 여러분들, 그냥 편하게 대놓고 말해주면 안 되겠니. ‘직설화법의 천국’에서 온 언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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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의 한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이영희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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