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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과 김남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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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10면

1979년 10월 초에 발표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문단에도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구속된 ‘남민전’ 조직원 84명 가운데 평론가 임헌영과 시인 김남주 등 문인이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민족문학 계열의 참여파 문인들은 사건에 핵심적 역할을 한 김남주에 주목했다. 그들은 김남주가 60년대의 김수영·신동엽과 70년대 김지하의 맥을 잇는 반체제 저항운동의 보다 강력하고도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김수영 등 선배들이 문학을 통한, 글쓰기를 통한 저항의 본보기였다면 김남주는 일찍부터 몸으로, 행동으로 체제에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戰士)’라 즐겨 불렀던 데서 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5>

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김남주는 광주일고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69년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저항적인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3선 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72년 유신헌법 선포 후 국내 첫 지하신문인 ‘함성’을 제작, 배포한 데 뒤이어 이듬해 ‘고발’을 만들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기에 이른다. 8개월 만에 풀려나지만 그는 전남대에서 제적당하고 그때부터 그의 생애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예고되고 있었다.

김남주가 문학, 시에 눈 뜬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습작에 몰두하던 김남주는 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데뷔작부터 투쟁적이었고 전투적이었다. 이듬해인 75년 다시 광주에 돌아와 서점 ‘카프카’를 운영하면서 그의 저항정신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그리고 호찌민 등 제3세계 혁명가들의 사상으로 무장되고 있었다. 그 후 78년 서울로 올라와 ‘남민전’에 가입한 것이 그의 삶을 형극의 길로 이끈 계기였다.

‘남민전’ 사건은 문단 내의 불협화음으로 이어졌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구속 문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무렵 한 문인 모임에서 김동리가 ‘김남주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므로 절대 석방돼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파문은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실’의 핵심 문인들은 김동리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김동리가 재직 중이던 중앙대 학생들은 김동리의 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여 김동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 와중에서 입장이 가장 난처해진 사람은 이문구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동리와 이문구는 20년 가까이 사제관계이면서 부자관계에 못지않은 끈끈한 관계로 얽혀져 있었다. 김동리가 창간한 ‘한국문학’의 편집실이 이문구의 주도로 ‘자실’ 창립의 산실 역할을 했을 때 문학적 이념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김동리가 모르는 체 눈감아줬던 것도 이문구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김남주 등 구속 문인 석방을 둘러싼 공방에서 이문구가 스승을 두둔할 수도, ‘자실’의 편이 될 수도 없는 입장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며칠 동안 고심하던 이문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자실’의 지도부를 공박하면서 ‘자실’의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탈퇴는 유보됐지만 공방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이문구는 지도부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문구로서는 ‘자실’ 창립 때 스승에게 진 빚을 갚은 셈이었다.

어쨌거나 그와 같은 문단의 소용돌이와는 관계없이 김남주는 80년의 결심 공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88년 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지만 그에게 9년 가까운 그 긴 세월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꾸준히 책을 읽고 대여섯 나라의 언어를 익혔으며 무엇보다 휴지조각ㆍ우유팩ㆍ은박지 따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꾸준히 시를 썼다. 그 작품들이 세상 밖으로 흘러나와 투옥 중에만 『진혼가』(84년), 『나의 칼 나의 피』(87년) 그리고 『조국은 하나다』(88년) 등 3권의 시집이 나왔다.

그의 시 작품들은 대개 살벌하고 섬뜩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따금 민족 정서를 밑바닥에 깐 따뜻한 서정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좋은 세상, 밝은 사회에서 본격적인 서정시를 써보고 싶다’던 그의 희망이 단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희망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췌장암으로 투병 중 94년 2월 숨을 거두고 만다. 김남주는 어둡고 어지러웠던 한 시대가 만들어 낸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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