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마인드’가 위기 불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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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35면

그리스 등 일부 남유럽 국가의 부도위기 여파로 연일 세계 금융시장이 출렁거리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2008년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한국도 이번 위기의 파장에 신경 쓰는 모습이다. 현재까지는 각국의 주가지수와 투입되는 구제금융 액수 등을 보면서 이번 사태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 같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숫자 외에 다른 요인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바로 사태의 진앙지인 그리스 국민의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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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피가로가 지난달 자사 웹사이트에서 시작한 설문조사는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프랑스인의 평가를 보여준다. 설문은 ‘그리스가 유로존이 지원하는 구제금융을 갚을 거라고 생각합니까?’였다. 일단 질문 자체가 충격적이다. 유력 언론사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빚을 떼먹을지 아닐지를 놓고 조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답은 더 가관이다. 2만5887명의 네티즌이 응답(8일 오후 4시 현재)했는데 ‘아니오’라는 대답이 76.91%에 달했다. 프랑스 사람 네 명 중 세 명꼴로 그리스에 돈을 빌려주면 떼일 거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프랑스 의회는 6일 그리스에 168억 유로(약 25조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떼일 거라고 대답한 프랑스 사람들의 ‘배신감’이 짐작된다. 이 배신감은 프랑스에도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는 위기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프랑스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된 걸까. 대답을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연초 그리스 정부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12.7%인 재정적자 규모를 2012년까지 2.8%로 줄이기 위해 공공 분야 임금 동결, 세금 인상 등의 방안을 발표했다. 이후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은 당장 나라 곳간이 비었는데도 자신들이 받을 빵이 줄어드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쳤다. 파업과 시위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시위대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정부에 반기를 드는 행위는 허리띠를 졸라매 빚을 갚으려는 국가의 노력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돈 빌린 사람의 상환 의지가 의심스럽다는 것, 그걸 알면서도 빌려주는 것을 지켜본 이웃 국민들이 느끼는 상실감, 그리스발 위기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는 단지 그리스 부채액만 가지고 그 파장을 따져서는 곤란하다. 그리스의 빚은 2360억 달러 정도지만, 여기서 출발해 얽히고설킨 유럽 부도 위험국 PIIGS(포르투갈·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의 전체 빚은 4조 달러에 달한다.
한국이 외환위기 속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갔을 때 우리 국민은 빚을 갚기 위해 장롱 속에 숨어있던 금을 모아 외국에 팔았다. 채무액에 비하면 미미한 액수였지만 그 금에 담겨 있던 위기극복 의지가 그 많은 빚을 갚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에 반해 국가 빚은 나 몰라라 하는 그리스 국민의 마음가짐은 자국발 위기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못지않게 유럽발 금융위기에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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