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주고 멘토 붙이고 …회사가 먼저 신입사원에 적응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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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24면

정태일 윤선생영어교실 대리는 젊은 직장인이 본 회사의 모습을 그린 책을 최근 출간했다. 최정동 기자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라는 요즘 신입사원이지만 열 명 중 세 명꼴로 1년 이내에 그만둡니다. 기성세대들은 ‘요즘 젊은 것들은 인내심과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성토합니다. 뻔히 손해 보는 줄 알면서도 ‘손절매’를 하는 새내기들의 절박한 심정을 담았습니다.”

정태일의 『서른 살, 회사를 말하다』 30대 직장인이 쓴 ‘신입사원 사용설명서’

최신 유행의 날씬한 은회색 정장에 검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정태일(32) 대리. 밝은 미소 때문인지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인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벌써 직장 경력 5년 차다. 세 번째 직장인 윤선생영어교실에서 홍보 담당으로 일하며 올 초에는 대리로 승진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낸 책 『서른 살, 회사를 말하다』의 내용이 묘하다. 신입사원이 회사에 적응하려면 이리저리 해야 한다고 알려 주는 기존 자기계발서와는 딴판이다. 입사 7개월 만에 야근에 치이다 여자친구와 이별 위기를 맞는 ‘투덜이 나’, 엘리트 입사 동기 ‘엄친아 진국’ 등이 등장하는 소설 형식이다. 신입사원 입장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회사 조직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책에서 진국이가 갑자기 사표를 내며 ‘상사들을 지켜보니 퇴사할 용기가 났다’는 부분이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실력도 없고 희망도 없이 퇴근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지키며 후배들만 들들 볶는 선배들을 많이 봤습니다. ‘상사는 신입사원의 미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5년, 10년 후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30세 안팎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먹고사는 것에 대한 걱정’을 안 해 본 세대인 만큼 ‘비전’이 없는 생활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주말 데이트를 앞둔 금요일 저녁, 갑자기 사무실로 호출한 상사는 월요일에 새 보고서를 내라고 지시한다. 결국 토요일 약속을 못 지킨 나는 이별 통보를 받는다. 일을 시킨 상사는 “보고서가 연기됐으니 푹 쉬라”고 전화하고는 일주일간 휴가를 가 버린다. 속이 뒤집힐 노릇이다. 하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 어느 화창한 휴일, 데이트 중에 냉면 한 젓가락을 먹다 말고 회사로 불려 들어간 기억은 누구나 있지 않은가.

“실제로 오후 7시부터 여자친구가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데 상사가 퇴근하지 않아 오후 11시까지 기다리게 한 적이 있습니다. 첫 직장이던 사보 편집대행사에서는 수습이라고 65만원을 받았습니다. 늘 야근에 시달리면서 6개월이 지나니 100만원을 주더군요. 하지만 월급이 적고 야근이 잦기 때문에 회사 생활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입사원은 해외연수·학점·공모전이라는 ‘취업 3종 세트’를 갖춰 바늘구멍을 통과한 나름대로 엘리트 낙타인 셈입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와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됩니다. 취업만 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환상이 깨지면서 방황하는 ‘신입사원 사춘기’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입사원들을 어찌해야 할까. 신현만 커리어케어 대표는 추천사에서 “회사와 상사라는 ‘괴물’이 애써 뽑은 인재를 어떻게 내쫓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책은 임원과 간부들에게 ‘신입사원 사용설명서’인 셈”이라고 말했다. 정 대리는 신입사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와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줄 멘토가 꼭 필요하다고 꼽았다.

“신입은 훈련병과 같습니다. 사격 못 하고 행군하다 쓰러진다고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하고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최소한 편안하게 말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 멘토링 해 주는 정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10점을 모두 쏘라고 다그치면 벌벌 떨지 어느 신입사원이 총을 쏘겠습니까.”

훈련병 얘기는 본인의 경험에서 나왔다.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 대리는 서울시립대를 졸업했다. 2003년 ROTC 장교로 임관해 논산 훈련소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2005년 제대 직후 특별전형으로 대기업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유럽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70일 동안 프랑스에서 스페인을 거쳐 독일까지 돌아다녔다. 귀국 후 2년간 두 회사에서 일하다 2007년 윤선생영어교실로 직장을 옮겼다. 다양한 업체에서 신입사원 경험을 쌓은 끝에 책을 내게 된 셈이다. 그는 책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이 자신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본인뿐 아니라 친구·후배들이 겪은 일을 모아 젊은 직장인들이 느끼는 점을 썼다는 설명이다.

“제 책에 두 사람의 상사가 나옵니다. 무능하지만 사내 정치에 민감한 ‘복댕이’ 김 차장, 그리고 그가 밀려난 뒤 그 자리를 차지한 해외파 일벌레 ‘미실’ 강 팀장입니다. 각각 실력 없고 부하 직원을 달달 볶는 무능력한 상사와 실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상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닙니다. 복댕이나 미실 모두 ‘이런 상사 밑에서는 신입사원이 견뎌 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가장 불만족스럽던 상사의 모습을 정형화한 것입니다. 신입사원 입장에서 ‘이러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강하고 극단적인 경우만 쓴 감이 있습니다.”

그는 신입사원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간부들이 젊은 세대의 특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입사원이 기존 조직에 적응하느냐, 조직이 젊은 피를 받아들여 변화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수준이다. 사회생활 경험이 많고 권한이 큰 상사들이 먼저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를 포함한 젊은 세대들은 과외를 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바로 묻고, 피드백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어요. 또 부딪치고 깨지면서 배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미리 갈 방향을 알려 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로스 없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현재 직장에서 4년 차에 접어들고 승진도 하다 보니 후배들에게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아요.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불합리한 것을 보면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만이 ‘쿨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겁하다고 선을 그어 버리는 헛똑똑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10번도 넘게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를 반복했던 여자친구와 다음 달 결혼한다.
“싸우고 화해하며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2~3년이 걸렸습니다. 신입사원은 그걸 못 참고 퇴사해 버립니다. 애인과는 싸우더라도 뭔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견디는 거잖아요? 회사도 방법은 다르지만 신입사원이 뭔가 해 보려는 것을 받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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