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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출자총액제한은 부당한 간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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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재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여당 의원만의 찬성으로 출자총액과 금융계열사 의결권을 제한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를 통과했다. 출자총액제한은 1987년 최초로 도입됐다가 98년 2월 외환위기 때 정부가 스스로 폐지했는데, 이를 부활시킨 것도 모자라 더욱 고삐를 바짝 죄고 있는 것이다. 폐지 당시 정부는 99년 말까지 부채비율 200%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재계는 계열기업 간 순환출자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규제 철폐를 요구했다. 재계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정부는 '외국인의 경영권 위협에 대처방안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규제를 철폐했다.

정부의 방조 아래 계열사 A는 계열사 B에 현금 증자하고, 계열사 B는 계열사 C에, 그리고 계열사 C는 다시 계열사 A에 증자함으로써 계열사 모두 부채비율을 쉽게 낮출 수 있었다. 이런 순환출자는 금융기관 구조조정에도 벤치마킹됐다. 산업은행의 자본 확충을 위해 투입된 공기업 주식은 다시 투신사로 이전돼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맞추기에도 순환출자라는 묘수가 활용됐다. 부채총액은 줄지 않았는데 부채비율만 낮아진 우스운 구조조정이 관민 합작으로 완료됐다. 당시 우리 기업의 부채비율이 높았던 것은 국민이 주식시장을 불신해 은행 예금에만 치중했고 은행들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 기업대출에 주력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었다. 따라서 기업의 부채비율 축소를 위해서는 주식시장의 신뢰성 회복을 통해 국민의 저축 행태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데 정부는 기업을 들볶는 손쉬운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순환출자 등으로 쏟아져 나온 주식은 대거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 오늘날 외국인 우량주 독식사태가 발생했다. 기업 부채는 외국인 지분으로 대체됐고, 이들은 알짜 국내 기업에서 고율 현금배당, 우선주 매입소각 등 핵심 경영사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외국인 주식지분이 단기간에 급증하는 바람에 일각에서는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런데 정부의 입장이 돌변했다. 순환출자를 뻔히 예상하면서 규제를 폐지했던 공정거래위원회가 순환출자가 완료된 99년 말 갑자기 '무슨 이유인지' 출자총액제한을 부활시키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고는 업계가 미처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세계에 유례없는 출자규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대비책을 세우지는 못할망정 그룹이란 이유로 국내 기업에 불이익을 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업 투자가 부진하고, 우량기업이 외국인의 경영권 위협에 노출된 것은 정부의 변덕에도 책임이 있다.

기업은 미래에 먹고살 수 있는 새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생존할 수 있다. 신규 사업은 기업 내에서 새 부서를 신설해 투자할 수도 있고, 영업 중인 다른 회사의 주식을 인수하는 출자를 통할 수도 있다. 기업 인수를 통한 출자는 묶어놓고 투자만 하라는 것은 부당한 간섭이다.

출자규제의 반사이익을 얻게 될 외국인 투자자들은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글로벌 스탠더드에는 없는 일이라 입을 다물고 있다. 규제 찬성론자들 사이에서도 5대 그룹만 적용해도 충분하다는 등 무책임한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출자규제 혹은 의결권 제한을 받는 우량기업이 외국계 투기자본에 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면 우리 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근래에 와서 사외이사제도 강화와 집단소송제 도입 등을 통해 대주주의 전횡이 견제되고, 다양한 주주 구성을 통해 시장 규율도 작동하고 있다. 기업의 출자 의사결정은 정부 규제보다 기업가와 시장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정도다. 98년 정부가 밝힌 명분처럼 '외국인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고 투자와 고용을 촉진할 수 있도록' 출자총액제한은 전면 철폐돼야 한다.

이만우 고려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