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8 따라잡기] 책의 숲에서 뛰노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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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나는 꿈꾼다. 아이들이 맑은 눈동자로 책장을 넘기며 때로 자신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그래서 창 밖의 매미 소리가 책갈피 속으로 스며들어 다시 소나기 후둑거리는 소리로 흘러 나오고 어느새 붉은 잎사귀 너머 하얀 눈이 온 세상을 푸근하게 덮는 풍경을.

그 비밀스러운 세계 저편에서 할머니의 옛 이야기가 자장가와 함께 풀려 나오고 잠길 듯한 눈동자로 깊은 상상의 바다를 출렁거리는 아이들의 밤. 별들이 우주의 곳곳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경이의 순간을 나는 꿈꾼다.

머리카락을 움켜 쥐며 원고지 앞에서 괴로워 하는 어린 신음들이 없으며, 무엇을 읽어야 할까 어쩔 줄 모르는 몸짓들이 또한 없는 곳, 딱딱한 의자 대신 편안한 소파에 파묻혀, 아니면 서가 사이에 놓여진 흔들의자에서,

아니면 울창한 책의 숲에서 진지하게 빛나는 눈동자들이 있는 곳, 어두컴컴한 형광등이 차갑게 부서지는 대신 따뜻한 불빛이 꽃잎 같은 개인등이 놓인 책상들,

여러 책이 서로 어울려 신비스러운 화음을 내는 학교 도서관, 창 밖으로는 기억할 만한 언어의 향연이 벽마다 모퉁이마다 가득 씌어져 있는 곳, 인간의 내음이 나는 작은 이야기들이 연가곡처럼 이어지는 곳을 나는 꿈꾼다.

가녀린 숨소리들이 집과 학교, 그리고 거리에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어지럽게 헤맬 때 현명하고 섬세한 영혼들이 책 속에서 걸어나와 열정적으로 말한다. 스스로를 용기 있게 키우라!그래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하라!

한적한 길과 북적거리는 마당,무한한 여백의 칠판 앞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준비하는 꿈, 마지막 과즙이 달콤하게 배어드는 과일처럼 감성과 지성으로 점점 푸르러지는 숨소리들,

마침내 젊은 활엽수들이 온몸을 흔들며 서정의 시를 낳고 다시 오랜 세월을 역사의 진실로 깊이 새겨내는 꿈,

바람의 호흡을 들으며 먼 곳의 작은 지붕들을 떠올리고 골목마다 살며시 퍼지는 저녁 준비 내음에 정겨운 순간들을 그려내는 꿈, 모두 몇 줄의 글귀를 가슴 깊이 심어 어느새 훌쩍 커져 성큼성큼 걷게 되는 꿈을 나는 꾼다.

마침내 그러한 발걸음들이 험한 산과 거친 물을 지나 모이고 모여 국적과 인종, 종교와 계급을 떠나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꿈, 푸른 영혼들이 날줄과 씨줄이 된 아름다운 세상에서 나지막이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더 큰 삶을 꿈꾸는 꿈, 수많은 빛이 모여 마침내 불꽃을 일으키듯 큰세상을 만드는 꿈을 나는 꾼다.

책의 숲으로 가는 길.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길을 더듬어 가는 길, 걸음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쉬지 않고 걸으며 씨를 뿌리고 떡잎을 보살피다 보면 어느새 풍요로운 책의 숲, 언어와 인간이 행복하게 만나는 은혜로운 삶의 숲을 나는 꿈꾼다.

허병두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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