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정진규 '자정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모든 사물들을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게 아니 된다 실물크기로 그리고 싶다 사랑하는 자정향(紫丁香) 한 그루를 한번도 실물크기로 그려낸 적이 없다 늘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이 내 솜씨다 오늘도 너를 실물크기로 해질녘까지 그렸다 어제는 넘쳤고 오늘은 모자랐다 그게 바로 실물이라고 실물들이 실물로 웃었다

-정진규(1939~ ) '자정향'

나이 육십 넘어 한 대상을 바라보는 허허로움이 젊은이들 인스턴트 미각과 다른 점이다.정진규씨의 짧은 산문시는 그가 그의 연령을 가능한 한 자제하고 삶의 깊이를 '된장'으로 남기기 때문에 바흐의 '무반주'를 듣는 그 나이에 와 있다. 자정향(紫丁香)은 난(蘭) 향기 쯤으로 다가온다.

그림이 원숙해져야 난을 칠 수 있다.산문시 속에 산방(山房) 주인 같은 헛기침도 때로는 들어 있다. 그의 '부드러운 빠듯함'같은 것도. 그의 육십 연애는 실물들이 서로 모자라는 것을 자인하면서 웃고 있다. 허공에 붓자국 지나간 난을 치듯.

김영태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