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환상문학의 최고봉 어슐라 르 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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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팬터지는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독서.영상 시장을 지배해 온 키워드 중의 하나다. 동화에서는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이 장르는 그러나 초현대적이고 기괴하게 소설.게임.만화.애니매이션.영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공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

환상적 놀이공원인 디즈니랜드도,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 팬터지아도 팬터지이고 수백만 명의 유저를 거느린 게임 리니지나 디아블로 Ⅱ도 팬터지다. 대학생들도 많이 읽는 '퇴마록'같은 소설 역시 팬터지다.

물론 지금 우리 독서시장에 성인용.아동용, 소설.만화 등 여러 판본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등도 '원조 팬터지'다. 무소불능한 신이나 영웅, 혹은 귀신 이야기 같이 팬터지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팬터지 소설에서는 근대 이성에 기초한 시민사회가 개척한 장르인 근대 소설(Novel)의 '이야기의 현실성과 당위성'이 없다. 즉 팬터지는 근대 이전의 이야기와 꿈으로의 귀환이며 이성의 힘만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넘어서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SF의 노벨상'6차례 수상

지금 전세계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까지 사로잡고 있는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시리즈의 호비트나 드워프 같은 종족의 구조는 켈트와 북구의 신화들에서 유래하고, 기사나 귀족 등의 사회적 구조는 중세 유럽의 기사담을 복제.변형하고 있다.

이러한 전설과 민담을 종합하여 현대성을 부여한 작가들로는 『코난』 시리즈로 유명한 영웅 팬터지의 창시자 로버트 하워드, 『크툴루』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암흑 팬터지의 거장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반지의 제왕』을 쓴 팬터지의 아버지 J.R.R. 톨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에 비하면 『어스시 연대기』를 쓴 어슐라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의 이름은 높은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가장 먼 해변』(1973)으로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고, SF문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여섯 차례나 받았으며, 그와 쌍벽을 이루는 네뷸러상을 다섯 차례나 수상한 이 낯선 여성 작가는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유일한 팬터지 작가''리얼리즘에 반발해 스스로 SF와 팬터지 문학을 선택한 이방인''남성 중심의 장르 문학을 여성의 시선으로 해체한 여성 문학의 대가' 등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문학의 한 중심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9년 인류학자인 아버지 앨프리드 크뢰버와 아동 문학가이자 인디언 문화 연구자였던 어머니 테오도라 크뢰버 사이에서 태어난 르 귄은 래드클리프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으며, 컬럼비아대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해 거기서 역사학자인 남편 샤를 르 귄을 만났다.

62년 『파리의 4월』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르 귄의 문학적 생애는 한 마디로 '비소속의 작가'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주류의 사고를 반복하는 리얼리즘에 반하여 소수자의 세계 인식을 그려냈으며, 위계를 부인하는 질서의 가능성에 주목하려고 팬터지와 SF를 자신의 문학적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순문학의 이방'으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남성위주의 남성적 가치관으로 점철된 팬터지와 SF의 영토에 극도로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를 구사하면서 여성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대중문학의 타자(他者)'로 평가된다.

또한 유려한 문장으로 『노자(老子)』를 번역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낸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서양(또는 백인) 중심의 사고에 저항해 동양(또는 비백인) 중심의 사유와 이야기 방식을 끌어들임으로써 그의 문학은 '미국(서양)문학의 피안'에 존재한다.

이러한 미묘한 작가적 입장은 그녀를 주류와 비주류 양쪽에서 모두 이방인으로 배척하도록 만들었다. 주류 문학에서는 그녀를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문학적 재능을 낭비하는 작가라고 비판하지만, 장르 문학에서는 '팬터지와 SF의 탈을 쓴 철학 실험'이라는 말로 그녀를 경원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새로운 문학을 만들어냈듯이, 르 귄 역시 그 외떨어진 자리로 인해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줄타기의 이유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다. 팬터지든, SF든, 『전쟁과 평화』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작품이 좋으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희대의 걸작인 『어스시 연대기』는 심오한 철학적.인류학적 통찰을 통해 팬터지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헤인이란 행성에서 퍼져나가 주변의 행성들에 살고 있는 인류의 이야기를 다룬 SF의 걸작 『헤인 시리즈』와 함께 르 귄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어스시'는 'Earth(땅)'와 'Sea(바다)'를 합쳐서 만든 신조어로, 르 귄이 창조한 환상의 세계다. 이 세계는 학문 대신 마법을 배우고, 학교에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들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이들 마법사는 거의 현자(賢者)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마법이 사물의 진짜 이름을 부를 때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법을 배우는 것은 곧 인간과 자연의 참 의미(본질)를 추구하는 과정이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여성.동양.소수자의 시각

『어스시 연대기』의 첫째 권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주인공인 소년 마법사 게드는 금지된 마법을 시현하려다 마법을 쓸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사악하고 이기적인 자아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빼앗으려는 어둠의 존재와 싸워가면서 공포에 질려 세계 끝까지 도망친 게드는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 그러니까 그 어둠의 존재가 바로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발견하게 돼 그것을 물리치고 본래의 마법을 되찾는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겪는 심리적 갈등을 이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보기 힘들며,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르 귄은 20세기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을 만하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팬터지 소설의 시작은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이수영의 『귀환병 이야기』, 전민희의 『세월의 돌』 등 사이버 공간에 숨어 있던 수많은 팬터지들이 책으로 출판돼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다.

한 해에 창작되는 장편 팬터지는 무려 5백여 편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며, 중.단편까지 합치면 그 수를 짐작하기 어렵다. 문학청년들의 창작 에너지를 무한히 빨아들이고 있는 이 환상의 장르가 이후 르 귄 만한 문학적 성과를 이룩해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게 되기를 기원한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 어슐라 르 귄은…

▶1929년 미 캘리포니아 버클리 태생

▶래드클리프칼리지 졸업 후 콜럼비아대에서 중세 불문학 석사 학위를 받음

▶53년 파리에서 교환 학생으로 있던 때 역사학자인 샤를 르 귄과 결혼

▶62년 SF잡지 『팬태스틱』에 『파리의 4월』을 발표하며 데뷔

▶69년 『어둠의 왼손』으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에서 최고의 과학 소설로 선정.『어스시 연대기』의 『어스시의 마법사』와 『아투안의 무덤The Tombs of Atuan』 거푸 출간

▶73년 『어스시의 연대기』의 세번째 작품 『머나먼 바닷가』로 어린이 책을 위한 '내셔널북상' 수상

▶74년 『빼앗긴 사람들』로 휴고상.네뷸러상 동시 수상

▶90년 『어스시 연대기』의 네번째 작품 『테하누』로 네뷸러상 수상

▶현재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 거주

▶현재 『어스시 연대기』 1~3편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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