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들러리 장애정치인의 비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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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증 척추장애인으로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던 장애인 인권운동가 이일세(李一世)씨가 당무위원과 장애인특위장직을 사퇴한다는 사직서를 냈다.

미국 하버드대 유학 시절 장애인 학생회장을 지낼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정치권의 변화를 이끌겠다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수직도 내던질 정도로 사명감이 투철했던 그였지만 '현실정치'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대는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도처에 팽배해 있다. 휠체어 통로가 없는 곳이 태반이며 인도에는 커다란 돌말뚝이 제멋대로 박혀 있어 장애인은 마음놓고 거리를 다닐 수조차 없다.

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살기는커녕 이들을 위한 복지시설이나 학교가 인근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집단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임에도 오히려 사회적인 핍박을 받아 2중.3중으로 아픔을 겪는 것이 바로 우리 장애인들의 삶이다.

그러함에도 5백만명을 헤아리는 장애인 가운데 이들을 대표할 국회의원조차 몇명 없는 게 우리의 정치현실이다. 2백70명의 현역의원 중 단 두명뿐이며 세곳에서 치러지고 있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도 장애인 후보를 내보낸 정당은 단 한곳도 없다.

근래에도 민주당 전신인 국민회의와 평민당이 15대와 13대 국회에서 각각 전국구와 지역구로 한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각계 각층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주력해야 할 정당의 공식기구에서도 장애인은 아예 뒷전이다.

고작 민주당이 비상설로 장애인특위를 운영하고 있을 뿐 국회 제1당인 한나라당이나 제3당인 자민련에는 아예 별도의 장애인 관련기구조차 없다. 선거철이 되면 표를 의식해 서로 뒤질세라 장애인을 위하는 척하다가 선거가 끝나면 '나 몰라라'하니 장애인 정치인마저 당직을 사퇴하지 않는가.

장애인은 들러리가 아니다. 각 정당은 그들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해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다각적인 대책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그들을 더 이상 좌절케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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